[정주영과 정치]92년 대선 고배이후 시련의 세월로

  • 입력 2001년 3월 22일 01시 14분


“CY라 불러다오.”

정주영(鄭周永)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개인사(個人史)에서 DJ, YS와 어깨를 겨루던 92년과 정계은퇴를 선언한 그 다음해만큼 굴곡이 심했던 시기는 없었을 것이다.

이 기간 그는 국민당 대표로 출발해 국회의원 대통령후보를 거쳐 형사 피고인으로 변했다.

그의 이니셜 CY는 정치에 입문한 92년 1월1일부터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한 12월18일까지 그가 항상 불러주길 바랐던 명칭.

정 전 명예회장은 77세 고령에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대통령후보였지만 그 해 3월 총선에서 창당 45일 만에 31석을 획득해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는 등 세인들에게 일대 파란을 몰고온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대통령 후보로 나선 직접적인 배경은 92년 언론 인터뷰에서도 밝혔듯이 현대그룹 세무조사에 대한 가시지 않은 ‘앙금’ 때문.

이에 앞서 그는 91년10월 주식 변칙증여 혐의로 세무조사를 받던 중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라는 자서전을 출간해 “몽준이가 출마했는데 청와대 경호실에 불려가 출마포기 압력을 받았다”며 정치권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1992.2.12
14대 대통령선거시절 빗속 강행군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그는 타고난 승부사 기질을 발휘해 약진을 거듭했다. 92년 1월 8일 그는 “6공에 매년 두 번씩 거액의 정치헌금을 냈다”고 발표하며 세인의 이목을 끈 뒤 그 다음달 8일 통일국민당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됐다.

1노(盧) 2김(金)의 시대에 치러진 총선에서 아들 몽준씨와 함께 나란히 국민당 국회의원이 된 그는 5월 6일 대선후보 등록을 마치고 “내 생애에서 지금이 최대의 시련기”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의 시련은 최대의 결과를 낳기 위한 진통이며 시련이 있기 때문에 성공할 것”이라며 자신감이 만만했다.

5월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그는 “집권하면 1년 뒤 재벌을 해체하겠다. 공산당 결성을 막을 필요가 없다. 아파트를 반값에 공급하겠다”는 등 깜짝 놀랄 만한 공약을 내세우며 저돌적인 대권 야망을 드러냈다.

그해 12월 그는 사전선거운동 혐의로 현대계열사에 압수수색이 들어와도 이종찬 김복동 김동길씨 등 당시 굵직한 정치인을 국민당에 끌어들여 취약한 입지를 넓혔다.

선거 막판에는 YS를 지지하는 부산 기관장 대책회의 내용을 폭로한 ‘초원 복집사건’으로 뒤집기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개표 결과는 3위 낙선. 이때부터 정 전회장의 기세는 급격히 꺾였다.

93년 1월15일 출국이 금지된 그는 서울지검 공안1부에서 대선법 위반 혐의 및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혐의 등으로 소환 조사를 받은 뒤 그 다음달인 9일 의원직을 포기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1992.3.31
3월24일 총선에서 31석을 획득 손을 들어보이는 정주영과 통일국민당 의원들

이어 그는 국민당을 탈당한 뒤부터 칩거에 들어갔다.

그는 98년 자서전에서 “5년 전 내가 낙선한 것은 나의 실패가 아니라 YS를 선택했던 국민의 실패이며 나라를 이 지경으로 끌고온 YS의 실패다. 나는 그저 선거에 나가 내가 뽑히지 못했을 뿐이다. 후회는 없다”고 밝혔다.

또 재판부를 의식한 듯 “혹자는 대통령 출마에서의 낙선을 두고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라고 주장하던 내 인생의 결정적 실패라고 하는 모양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쓰디쓴 고배를 들었고 보복 차원의 시련과 수모도 받았지만 나는 실패한 것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92년 출마 당시 2000억원을 국민당에 기부해 정치대학을 설립하겠다는 그의 약속은 끝내 물거품이 됐으며 그가 당원 단합대회 때 즐겨 불렀던 ‘가는 세월’처럼 그는 흘러가는 시간을 막지 못했다.

<정위용기자>viyon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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