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기업에 발목잡힌 우량기업들

  • 입력 2000년 11월 22일 18시 41분


“연말까지 돌아올 부채를 만기연장해 줄테니 회사를 끌고가세요.”(채권단)

“채권단에게는 고맙지만 우리가 살기위해서는 부도를 내는 수 밖에 없어요.”(SKM 대표이사)

지난 21일 서울 외환은행 회의실. 오디오테이프 제조업체인 SKM(구 선경마그네틱)의 자금지원을 위해 열린 채권단회의에서 이해하지 못할 광경이 펼쳐졌다. 돈을 빌려준 은행들은 살려주겠다는데 해당 기업은 굳이 최종부도에 이은 법정관리를 고집한 것.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의 박은철 차장은 “SKM은 올해 150억원의 영업이익이 예상되는 우량기업으로 채권단이 조금만 도와주면 살 수 있는 기업”이라며 “그러나 부실 계열사에 발목이 잡혀 결국 부도를 선택하고 말았다”고 말했다.

사연은 이렇다. SKM은 93년 당시 사업확장을 위해 법정관리에 있던 동산유지(현 동산C&G)를 헐값에 인수했다. 그러나 이것이 불행의 시작이었다. 대그룹 공세속에 동산 C&G의 매출은 예상보다 늘지 않았고 이 회사의 차입금을 SKM이 대신 갚아주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지금까지 SKM이 동산 C&G에 지급보증과 대여금으로 지원해준 것만 약 1000억원. 문제는 영업이 회복되지 않아 언제까지 자금지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점. 또 만약에 동산C&G가 잘못될 경우 SKM은 1000억원 가량을 고스란히 물어내야 할 판이다.

SKM의 김영문 자금과장은 “부실 관계사의 고리를 끊지 않고서는 위험하다고 판단해 이같은 결정을 내렸다”며 “채권단도 지급보증을 풀어줄 수 없는 사정이어서 법정관리를 통한 법원결정에 따르기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법정관리로 들어갈 경우 채권채무가 동결된 상태에서 법원의 중재를 통해 지급보증한 금액 중 갚아야 할 돈을 줄임으로써 생존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 SKM의 복안이다.

이번 SKM의 케이스는 동아건설에 대한 7000억원의 지급보증 때문에 우량회사이면서도 최종부도에 이은 법정관리를 선택한 대한통운과 거의 유사하다. 대한통운도 일단 법정관리를 통해 채무를 동결한 뒤 동아건설이 내년중에 리비아공사 대금을 받게되면 자금문제를 해결한다는 전략을 갖고 있다.

우량업체이면서도 맥슨전자에 지급보증을 잘못 서준 바람에 사정이 어려워져 맥슨전자와 함께 워크아웃을 선택한 일동제약도 비슷한 사례.

서울은행 최동수 부행장은 “과거 연대보증을 통한 기업 확장의 부작용이 외환위기 이후 서서히 하나둘씩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며 “앞으로 기업을 평가하는데 있어 재무구조뿐만 아니라 지급보증 등 우발채무와 법원에 계류중인 소송상황까지 철저히 고려해야만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현진기자>witnes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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