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색깔이 재벌 운명 갈랐다"

  • 입력 2000년 11월 13일 18시 45분


'관리의 삼성',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LG', 전문경영인 체제에 일찍 눈뜬 SK'.주요 그룹 중 현재 안정적인 경영성적을 내고 있는 기업들의 경영문화는 흔히 이렇게 요약된다.

반면 창업자 1인의 카리스마 경영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현대와 대우의 처지는 완전히 딴판이다.

5개 그룹의 엇갈린 운명.그 뿌리를 더듬다 보면 이처럼 독특한 기업 체질과 만나게 된다.

현대의 어려움은 전형적인 '인치(人治)경영'이 빚어낸 결과다.창업자나 오너의 개인적인 성격이 그룹의 경영을 좌우하는 것은 국내 재벌의 공통적인 현상이지만 현대는 유난히 심했다.

여기에는 몇가지 사정이 있다.무엇보다 창업자인 왕회장(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최근까지 사실상 '현역'으로 그룹을 통치했다는 점이다.삼성 이병철,LG 구자경 회장처럼 경영권을 물려주고 완전히 물러나는 진짜 의미의 '승계'가 없었다.

왕회장은 그룹의 성장을 이끈 최대 동력이었지만 반면 장기집권의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새로운 경영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변화'를 가로막은 셈.이는 2세 형제가 많은데다 '왕회장' 이후 후계구도가 불분명한 점과 맞물려 그룹의 역량을 소모케 했다.

아버지에 대한 2세들의 충성경쟁은 대북사업에서의 과잉경쟁 등으로 나타났다.후계 레이스 속에서 경영 외적인 논리들이 회사 운영에 끼어들었다.합리적인 의사결정 시스템이 뿌리내리기 어려웠다. 현대에서 전문 경영인을 많이 배출하지 못한 것도 이런 이유들과 무관하지 않다.이른바 CEO 시장에서 삼성 출신은 다른 그룹에도 잘 팔리는 반면 현대 출신은 그렇지 못하다.

건설업종이 모태라는 점도 약점으로 작용했다.건설회사 특유의 거친 기질은 진격형 성장연대에는 미덕이었지만 정교함을 요구하는 최근의 경영환경에서는 군데군데 허점을 드러냈다.

김우중이라는 뛰어난 1인의 개인기에 의존했던 대우의 몰락도 이런 점에서 현대와 닮은 꼴이다.

반면 삼성은 철저한 일본식 관리경영이 어느 정도 시스템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 강점으로 작용하고 있다.가령 최근 친족기업인 새한이 부도를 냈을 때도 이건희회장 등 오너는 지원을 지시했으나 실무진이 이를 막았다.비합리적인 의사결정은 자동으로 브레이크를 걸게 돼 있는 시스템이 작동한 것이다.

LG는 모험심은 없지만 모범생처럼 회사를 운영하는 스타일.어려운 시기에는 잔뜩 몸을 움츠리는 행태는 점프력은 떨어지지만 늘 든든한 면모를 보여왔다.

SK는 주요 그룹 중에서는 전문경영인 체제를 실질적으로 받아들인 회사.고 최종현회장은 외국서 공부를 한데다 형님의 사업을 승계받은 것 때문에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 의식적으로 외부인사를 많이 기용했다. 과도기라는 지적도 있지만 지금의 손길승회장 체제도 이런 풍토에서 나왔다.

기업문화를 연구하고 있는 대구대 경영학과 이재규(李在奎)교수는 "문제는 독특한 기업문화가 아니라 얼마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느냐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명재기자>mj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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