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연말에 임원인사 없다

  • 입력 2000년 10월 12일 18시 40분


해마다 연말이 되면 한해 경영실적을 토대로 대규모 임원 인사를 단행해온 주요 그룹의 오랜 인사관행이 올해부터 근본적으로 바뀔 것으로 보인다.

삼성그룹은 12일 “매년 11월말∼12월초 그룹 차원에서 일괄 발표해온 임원 및 사장단 인사를 주주총회가 열리는 내년 2∼3월로 미룰 방침”이라고 밝혔다. LG 등 다른 그룹들도 경영진의 교체시기를 가급적 내년 주총일정에 맞추고 발표 형식도 그룹 대신 계열사별로 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

기업들이 인사 시기를 변경한 직접적인 이유는 주총과 인사를 실질적으로 연계시키라는 정부와 시민단체의 강력한 주문 때문. 정부는 “기업들이 주총에 앞서 임원 인사를 하는 것은 총수가 인사권을 전횡하는 대표적 사례”라며 여러 경로를 통해 ‘연말인사 불가(不可)’ 입장을 전달했다.

재계는 “주주들의 의견을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타당한 측면이 있지만 수뇌부 인사가 늦춰지면 새해 경영계획을 짜는 데 심각한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며 부작용을 걱정하고 있다.

▽왜 연기하나〓정부는 기업들이 주주총회의 승인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경영진을 재편하는 것은 기업경영의 투명성을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조치라는 입장. 회사의 주인은 주주인 만큼 사장단과 등기이사의 인사도 당연히 주총에서 결정돼야 한다는 논리다.

공정거래위원회는 한술 더 떠 이번에도 기업들이 인사내용을 미리 발표할 경우 고발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재계는 연말 인사는 어디까지나 ‘내정’일 뿐 공식임명은 주총 승인을 받은 뒤 이뤄진다는 점을 강조했지만 결국 정부의 입김에 밀리고 말았다.

▽업무공백 등 부작용 우려〓재계는 수십년간 기업현장에서 지속돼온 관행을 한꺼번에 바꿀 경우 극심한 혼란이 빚어질 것을 염려하고 있다. 당장 임원 승진이 예상되는 고참부장급과 자리바꿈이 예상되는 임원 등 인사 대상자들의 경우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은 물론 하급 직원들도 상사 거취에 신경을 쓰느라 업무 분위기가 뒤숭숭해질 소지가 크다는 것.

삼성 관계자는 “통상 연말에 내정 인사가 발표되면 기업들이 새 CEO(최고 경영자)의 지휘에 따라 사업계획을 확정지은 뒤 새해가 되면 목표를 향해 일사불란하게 뛰는 방식으로 일해왔는데 앞으로는 2, 3월에 임명받은 CEO가 업무 보고부터 새로 받아야 해 의사결정이 지연되는 사태가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LG의 한 임원도 “기업들의 모든 업무가 매년 1월을 기점으로 진행되는 점을 감안할 때 수뇌부 구성시기를 2, 3월로 늦추는 것은 여러모로 비효율적”이라고 지적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이병욱 경영조세팀장은 “아무리 좋은 제도도 현장에서 적응하지 못하면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다”고 말했다.

<박원재기자>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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