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난 기업들 "믿을건 오직 현금뿐"

  • 입력 2000년 9월 19일 18시 44분


“회사채 발행은 꿈도 못 꾸고 은행 돈 빌리기는 더 빡빡해지고…. 외환위기가 터지기 직전인 3년전으로 되돌아간 느낌입니다. 과연 올 연말까지 버텨낼 수 있을지 막막합니다.” (제조업체 A사 자금담당자)

“영업을 해서 이익이 생기면 언제든 현금화가 가능한 자산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불확실한 상황이 정리되기 전까지 신규투자는 하지 않을 작정입니다.”(중견 B그룹 임원)

유가폭등과 대우차매각 지연, 이에 따른 주가폭락 등 경제 악재가 잇따르면서 중견기업들의 자금난이 가중되고 있다. 비교적 형편이 나은 기업들은 현 상황을 ‘비상시국’으로 규정, 신용경색이 본격화할 것에 대비해 현금확보에 돌입한 상태. 하지만 당장 운전자금조차 마련하기 어려운 상당수 기업들은 사채시장 등을 통해 하루하루 근근히 연명하면서 애만 태우고 있다.

▽꽁꽁 얼어붙은 자금시장〓삼성 LG SK 등 ‘빅3’외에 롯데 제일제당 등을 빼면 투자적격인 신용등급 BBB급 회사들도 회사채 발행을 통한 자금조달은 아예 엄두를 내지 못하는 실정이다. 투자적격 기업중 일부는 기업어음(CP)을 발행해 급전을 융통해 쓰고 있지만 기간이 한달이내로 짧을 뿐만 아니라 인수자를 구하기도 쉽지 않다.

은행대출도 어렵기는 마찬가지. 외환은행 관계자는 “연말이 다가오면서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에 신경을 써야 하는데다 대우차 매각가격이 깎이면 대손충당금을 추가로 쌓아야 하는 부담이 생기기 때문에 기업 대출을 줄일 수밖에 없는 처지”라고 말했다.

삼성투신운용 관계자는 “연말까지 만기가 돌아오는 회사채 규모가 40조원에 이르는 상태에서 은행대출마저 끊기게 되면 신용경색의 악순환이 빚어질 것”이라며 “특단의 대책이 없는 한 연쇄도산이 불가피하다”고 우려했다.

▽발 구르는 기업들〓제품의 40% 가량을 동남아에 수출하는 제조업체 C사의 자금팀은 추석 연휴가 끝난 뒤 한동안 거래를 끊었던 사채시장을 다시 찾았다. “납품대금을 받는 시기가 연말에 몰려 있어 석달만 지원해주면 된다”고 거래은행에 통사정했지만 은행측의 반응이 냉담했기 때문.

이 회사 자금팀장은 “7월까지만 해도 은행대출을 받기가 비교적 수월했는데 이달부터 분위기가 돌변했다”면서 “간부 직원을 총동원해 자금 확보에 나서고 있지만 솔직히 전망은 밝지 않다”고 털어놓았다. 박승복 중견기업연합회장은 “거의 모든 중견기업이 회사채 발행을 통한 직접적인 자금조달을 포기한 상태”라며 “이런 와중에 원자재 수입 비용까지 뛰어 중소 제조업체가 채산성을 맞추기가 더 힘들어졌다”고 말했다.

▽투자는 뒷전 “현금이 최고”〓D사는 지난해 증자를 통해 조달한 2000억원을 대출금 상환이나 설비투자에 쓰지 않고 아직도 현금성 자산으로 보유하고 있다. 자금팀 관계자는 “지금 상황에서는 자금시장이나 은행 모두 믿지 못하기 때문에 외부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마련한 자구책으로 회사를 운영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재계 서열 10위권인 모그룹도 부채 비율을 200% 이하로 낮춘 다음부터는 투자를 극도로 자제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들은 “이익이 나도 투자를 하지 않고 현금으로 보유하는 현상이 지속되면 국내 산업의 성장 잠재력은 소진될 수밖에 없다”면서 “설령 이 고비를 넘긴들 우리 경제에 무슨 미래가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박원재·정위용기자>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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