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대출신 CEO들 "기술모르는 관료들이 정책좌우"

  • 입력 2000년 8월 2일 19시 02분


지난달 27일 금강산으로 가는 배에서는 별난(?) 모임이 열렸다. 공과대 출신으로 기업의 최고 경영자를 맡고 있는 CEO들이 금강산 여행을 위해 가는 뱃길에서 선상회의를 연 것. 이번 행사는 한국 공학한림원이 주관했다.

이 단체는 1995년 당시 서울대 공대 학장이던 이기준 박사 등(현 총장)이 발기해 만들었다. 엔지니어링을 공부한 사람 중에서 최고 경영자 자리에 올라 회사 경영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이들을 주축으로 만들어졌다. 현직 공과대 교수들도 회원으로 영입하고 있다. 현재 정식 회원수는 264명.

전문 CEO들은 한국 공학한림원 산하에 최고경영인평의회란 이름으로 별도로 소모임을 갖고 있다. 이 평의회의 의장은 요즈음 제일 잘 나간다는 삼성전자의 윤종용 대표이사 부회장이 맡고 있다. 공학도 출신으로 정상급에서 뛰고 있는 CEO들은 여기에 다 모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은 그동안 회의 내용을 제대로 공개하지 않았다. 공학도 특유의 수줍음 탓도 있지만 내실을 기한다는 차원에서 은밀하게 운영했던 것이다.

이번 선상 회의는 달랐다. 언론사 기자들까지 초청한 가운데 공개적으로 모임을 가진 것. 공대 출신 CEO들이 사회에 정식으로 데뷔를 한 셈이다.

데뷔 첫 무대의 토론 주제는 ‘정치인과 관료들의 국가운영’이었다. 토론회에서 상당수의 CEO들은 “국가의 정책결정 과정에서 갈수록 전문가적인 식견들이 중요해지고 있는데 아직도 우리 사회는 제너럴리스트인 정치인과 경제관료들이 정책결정을 독점하고 있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들은 “전문 식견이 없는 정치인과 경제관료들에게 나라 운영을 맡김으로써 파국으로 몰고 가고 있다”면서 “경제 정치 법률 등 사회과학 전공자 대신 실물을 정확히 아는 공학도들이 전면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각 분야에서 전문가들의 의견이 수렴되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사회의 모든 이슈가 정치권의 이해관계나 정서적 차원에서만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

특히 ‘기술’이 국가의 경쟁력을 좌우하고 있는데 산업정책이 기술 전문가들의 의견을 도외시한 채 결정되고 있다는 데 초점이 모아졌다. 한 CEO는 “우리가 국회로 진출해 직접 의정활동을 하자”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또 일각에서는 “한국 한림공학원이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무게 있는 의견을 제시하거나 보고서를 제출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밖에 사회환원 차원에서 현직에서 은퇴한 CEO나 교수들이 일반 기업이나 벤처기업에 컨설팅을 해 주자는 의견도 심도 있게 논의됐다.

앞으로 어떤 형태로든 공학도들이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내겠다는 것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산업계는 군부 엘리트와 경제 경영을 전공한 사회과학도들이 주도해왔다. 1990년대 들어와 산업발전이 가속화되면서 공학도쪽으로 중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최근에 와서 벤처열풍과 맞물리면서 공대 출신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우리 사회 파워엘리트 진영의 역학구도가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미국이나 일본 등 선진국은 이미 오래 전부터 공학도를 경영인으로 중용해 왔다.

한림공학원 최고경영인 평의회에는 김광호 전 삼성전관회장, 유상부 포항종합제철 회장,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 성재갑 LG화학 부회장, 김윤규 현대건설 사장, 이용태 삼보컴퓨터 명예회장, 이종훈 전 한전사장, 진대제 삼성전자 사장, 서정욱 과학기술부장관, 배순훈 전 정보통신부장관, 남궁석 전정보통신부장관 등이 참여하고 있다.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도해 온 이들의 행보에 거는 기대가 자못 크다.

<이병기기자>ey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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