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사 '상표표시제' 유명무실…'짬뽕-덤핑油' 소비자 우롱

  • 입력 2000년 7월 2일 20시 10분


6월7일 오전7시55분. 부산 남구 우암동의 현대정유 저유소.

기름을 공급받는 현대정유 표시의 탱크로리 12대 사이에 LG정유 표시의 탱크로리 1대가 눈에 띄었다. 14분 뒤 또 한 대의 LG정유 탱크로리가 들어왔다. 그 사이에 먼저 왔던 LG정유 탱크로리는 저유소를 빠져나가 LG정유 표시의 주유소로 향했다. 이 저유소의 바로 옆에는 37만6000배럴 규모의 LG 저유소가 ‘멀쩡하게’ 있었다.

6월24일 오전10시. 경남 마산의 SK저유소에서도 비슷한 풍경이 확인됐다. 20여대의 SK표시 탱크로리 사이에 현대정유 탱크로리 여섯대가 나란히 기름을 받고 있었다. 이 지역의 주유소사장 김모씨(47)는 “이곳엔 평소 여러 정유사의 차량들이 늘어서 탱크로리 박람회장을 연상케 한다”고 말했다.

소비자들이 석유업계의 상표표시제에 기만당하고 있다. 정유사들은 자기네 ‘폴(Pole·깃발) 주유소’에 가면 자사 상품을 안전하게 구입할 수 있다고 선전하지만 실상을 한꺼풀만 벗겨보면 이는 허구이기 때문. 소비자들은 SK의 ‘엔크린’, LG정유의 ‘시그마식스’, 현대정유의 ‘오일뱅크’, S-Oil의 ‘슈퍼크린’을 결코 원할 때마다 구입할 수 없다.

▽정유사 간의 제품교환〓상표표시제를 규정한 공정거래위 고시 99-12호에 따라 정유사 간에 교환되는 상품의 품질간에 현격한 차이가 없다면 법적으로 문제될 것은 없다.

정유사들은 이같은 규정을 악용해 저유소 등에서 타사 석유제품을 ‘반제품’ 상태로 공급받아 자사 제품의 품질을 결정하는 특유의 첨가제를 주입한다고 주장하는 것.

그러나 실제로는 이미 타 정유사 첨가제가 주입된 상태에서 제품을 공급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LG정유측은 위에 언급한 부산의 현대정유 저유소에서 현대측의 완제품을 공급받은 사실에 대해선 “그랬다면 그것은 분명히 불법”이라고 시인했다.

이 경우 부산의 일부 소비자들은 LG주유소에서 현대의 제품 또는 ‘현대+LG의 짬뽕기름’을 구입했던 셈이다.

▽주유소에서의 덤핑유 교환〓음성적으로 유통되는 덤핑유도 상표표시제를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주범 가운데 하나.

30년 넘게 주유소를 운영해 온 부산 금곡주유소의 정만수(鄭萬洙)사장은 “전국 1만여개 주유소 가운데 직영주유소 1800여개를 제외한 나머지 가운데 5000여개의 폴주유소가 2개 이상 정유사 제품을 덤핑유 등으로 제공받아 섞어 파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렇게 유명무실한 폴사인제가 유지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정유사가 주유소들에 2억∼10억원의 설립 지원자금을 빌려주는 상황에서 대부분의 정유사-주유소 관계는 ‘현대판 노예관계’에 다름 아니기 때문.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서 모정유사 폴주유소를 운영하는 K씨(37·대학교수)는 계약기간이 끝나는 2002년7월 정유사를 상대로 소송을 내겠다고 벼르고 있다. 계약 당시 7년간 지원금 10억여원을 무이자로 주고 기름도 공장도가로 공급키로 합의했으나 98년부터 공장도가보다 비싸게 기름을 주더니 얼마 전엔 지원금 연체이자 3000여만원을 갚으라는 통지서까지 받았기 때문.

▽결국 소비자만 속는다〓최근 서울 강남에 폴주유소를 연 O씨(37)는 과연 ‘기름장사’를 계속해야 할지 고민이라고 털어놓았다. “일주일에 한두번씩 밤 10∼12시경 대리점에서 나오는 싼 기름을 제품 구분없이 그냥 받아 탱크에 쏟아 붓는 이웃 주유소들의 실상을 보면서 기가 막혔다.”

그는 “첨가제나 옥탄가가 모두 다른 정유4사의 제품을 섞어 팔면서 ‘우리는 특정제품을 판다’고 광고하는 것은 정유사와 주유소 스스로를 속일 뿐만 아니라 소비자를 우롱하는 처사”라고 개탄했다.

석유업계는 유명무실한 폴사인제는 폐지하든지 외국처럼 주유기에 폴사인을 달아 소비자가 원하는 기름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획취재팀>

▼상표표시제?/특정상표 주유소상품, 해당정유사서 품질보증▼

‘특정 정유사 폴을 단 주유소에 대해 해당 정유사가 상품의 품질을 책임진다’는 취지로 92년4월 시작됐다. 소비자가 정유사를 믿고 제품을 구입토록 하는 제도다.

그러나 95년 정유사들이 시장점유율을 높이기 위한 ‘폴 전쟁’을 벌이면서 이 제도는 정유사들의 ‘세력 확장용 장치’로 전락했다. 한 정유회사에 근무했던 J씨는 “정유사들의 덤핑유로 이미 유통질서가 파괴된 상황에서 상표표시제는 정유사들의 주유소 통제 수단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정유사 횡포 시정을" 주유소協 서명 돌입▼

사단법인 한국주유소협회(회장 원용근·元容根)는 본보 ‘석유시장을 파헤친다’는 시리즈 보도와 관련, 1일 전국 15개 지회장 긴급 모임을 갖고 전국 1만1000여명의 회원들을 상대로 정유사들의 자성과 정부의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주유소협회는 이날 “석유류 유통 질서의 문란과 파행적 가격 구조로 전국 주유소들이 최악의 경영 애로를 겪고 있으며 많은 자영 주유소들이 도산하고 있다”며 “현행 석유사업법을 전면 재검토하고 석유류 유통 질서 정상화 대책을 강력히 추진해줄 것”을 정부에 촉구하는 내용의 서명지를 작성, 전국 주유소에 배포했다.

주유소협회는 이어 “상표표시제(폴사인제)를 규정한 공정거래위원회 고시가 공급자 중심의 시장 구조를 고착시키고 정유사들의 횡포를 조장하는 불합리한 규정인 만큼 이를 폐지하거나 개선할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주유소협회는 금주중 회원들의 서명을 받아 청와대 공정위 산업자원부 등 정부기관에 제출,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이같은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폐업 등 집단 행동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협회 관계자는 “국내 석유시장에서 공급자인 정유사들의 횡포가 말도 못할 정도로 횡행하고 있다”며 “소비자가 중심이 되는 공개 현물시장 개설 등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승헌기자>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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