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3父子의 행보]일단 숨고르기 "정중동"

  • 입력 2000년 6월 2일 19시 04분


현대그룹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휴전협정도 없이 느닷없이 포성이 멈춘 상태.

그룹 자금난-채권단과의 협상-정주영(鄭周永)명예회장의 3부자 경영일선 퇴진선언-정몽구(鄭夢九·MK)회장의 반발-정몽헌(鄭夢憲·MH)회장 사퇴 등 열흘간 쉴새없이 긴박한 움직임이 전개되던 현대그룹이 2일에는 모처럼 평화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조용함은 우선 정몽구회장과 정몽헌회장이 미국과 일본으로 출국했기 때문. 그러나 이런 휴전상태는 숨고르기와 다음의 전투를 위한 전략회의를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오래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1일 이사회를 갖고 ‘정몽구회장에 대한 재신임’을 결의한 MK측은 2일 기아 자동차를 방문한 것 이외에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MH측도 “현대그룹은 자동차와 상관없이 전문 경영인 체제로 가겠다”며 애써 MK측에 눈길을 주지 않으려는 모습이 역력하다.

▽MK측 움직임〓일단 정명예회장과 MH측의 대응을 살펴보면서 하루빨리 이혼(그룹분리)을 하기 위한 수순을 밟고 있다. 내주에 공정거래위원회에 계열분리 신청을 할 예정.

또 ‘MH측 음모론’을 확산시키다 보니 자연스럽게 ‘정명예회장의 정신적인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의미가 돼 ‘왕회장’의 심기를 자꾸 건드리게 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있다. 일부 언론의 ‘정명예회장 사인조작설’ 보도도 MK측이 나서서 “사실이 아니다”며 진화할 정도. 너무 시끄러운 상황을 만들어 시장이 동요하고 결국 정부가 칼자루를 들고나서는 상황을 막기 위한 의도도 숨어있다. MK측은 스스로 공언한 ‘전문경영인’으로서의 위상을 구축하기 위한 다양한 작업에 나설 계획이다. 정몽구회장은 정명예회장이 지적한 ‘국제적인 감각을 갖춘 경영인’이라는 이미지를 대내외적으로 알리기 위해 세계 선진업체와의 제휴, 공동기술개발 등 그동안 비공개로 추진해온 각종 프로젝트를 빠른 시일 내에 마무리지어 발표할 계획이다.

정몽구회장이 2일 오후 미국으로 출국한 것도 이런 움직임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MH대응〓MH 진영은 MK의 경영권 고수에 일체의 대응을 삼가고 있다. 사실 대응할 수단이 없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에 가깝다. 구조조정본부는 지난달 31일 자동차측에 ‘몽구회장 해임’을 요구하는 이사회 개최를 요구했으나 이사회측이 “적법한 절차도 아니고 몽구회장이 상법이 규정한 해임조건에 맞는 경영상의 잘못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임을 거부하자 난감해하고 있다. ‘왕회장’의 지시였지만 법적인 검토도 없이 이사회 소집을 요구한 게 성급했다는 반성도 나온다. 그룹측은 이에 따라 당분간 MK측에 어떤 대응도 하지 않을 계획. 밖으로 표현은 하지 않지만 정부가 재벌개혁차원에서 나서줬으면 하는 바람도 은연중 드러난다. 몽헌회장은 임직원들에게 편지를 보내 정명예회장의 뜻을 존중하겠다는 뜻을 거듭 밝혀 몽구회장과의 차별화를 시도하기도.

▽침묵하는 명예회장〓정주영명예회장은 청운동 자택에 머물면서 일체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다.

평소 성격으로 볼 때 ‘항명’을 용납할 정명예회장이 아니기 때문에 그가 다시 한번 움직일 때 새로운 파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1일 일본으로 홀연히 떠난 몽헌회장은 MK측이 “3부자 동시퇴진이 MH의 음모”라며 상당히 불쾌해했다는 현대관계자의 전언. 이런 분위기는 김윤규(金潤圭)현대건설사장이 2일 현대건설 직원조회에서 “자동차부분에는 국제적인 감각을 갖춘 전문경영인이 와야 한다”고 말한 데서 읽을 수 있다.

구조조정본부는 계열사 전문경영인 체제확립이라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분주하다.

구조조정본부는 99년 그룹 구조조정본부가 밝힌 그룹을 5대 주력부분으로 분리, 각 그룹을 전문경영인이 이끈다는 원칙을 지키면서 지분관계를 정리하는 안을 현재 연구중이다.

<이병기기자>ey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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