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그룹 內紛]번지는 음모론…'왕자의 亂' 재연

  • 입력 2000년 6월 1일 19시 30분


정주영(鄭周永)명예회장의 고독한 결단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배경이 있는 걸까. ‘정씨일가 동반퇴진 선언’을 둘러싼 몇가지 의문들이 제기되고 있다.

우선 정회장이 과연 독자적으로 3부자 동반 퇴진의 결단을 내렸을까 하는 점이다. 정몽구(鄭夢九)현대자동차 회장측은 가신그룹의 음모론을 제기한다. 김재수(金在洙)구조조정본부장 김윤규(金潤圭)현대건설사장 이익치(李益治)현대증권회장 등 이른바 친 몽헌계 3인방이 각본을 짜고 사후적으로 명예회장의 도장만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다.

▽오락가락한 발표내용〓그룹측의 공식 발표와 달리 지난달 31일에 김재수본부장 혼자 청운동을 찾은 게 아니라 정몽헌회장과 김재수본부장이 동행했다는 점, 정몽헌 회장이 전혀 반발하지 않고 자필 사직서를 발표해가며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점 등이 그 근거.

이에 대해 정몽헌회장측에선 김재수본부장은 발표처럼 정명예회장에게 혼자 불려들어갔으며 나와보니 따로 호출을 받은 몽헌회장과 김윤규사장이 뒤이어 도착해 있었다고 해명하고 있다.

정몽헌회장측은 명예회장이 몽구회장의 퇴진을 직접 결정했다는 근거로 이미 수차례 몽구 회장에게 물러나라는 사인을 보냈다는 점을 강조한다. 7월 자동차소그룹으로 현대에서 분리돼 자동차 경영을 이끌 몽구회장을 혈육이지만 경영인으로서는 신뢰하지 않았다는 것.

그러나 몽구회장은 아버지의 뜻을 알아듣지 못했거나 알면서도 묵살했고 정명예회장은 3부자 퇴진이라는 초강수를 들고 나왔다는 해석이다.

사실 이번 정몽구회장의 퇴진 거부는 부친인 정주영명예회장에 대한 불복이라기 보다는 3월 정몽헌회장과 벌였던 경영권 분쟁의 ‘제2라운드’ 성격이 강하다. 형제간의 알력이 다시 수면위로 떠오른 ‘제2의 왕자의 난’이라는 시각이다.

이번 사태의 배경에는 3월 두 형제가 벌였던 경영권 다툼의 앙금이 깔려 있다. 당시 정명예회장이 직접 교통정리에 나서 몽헌회장의 손을 들어주면서 일단락됐지만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다. 이번 동반 사퇴 요구를 놓고 음모론이 확산되고 있는 것도 이처럼 서로 못믿겠다는 양측의 불신이 깔려 있는 것.

▽친필사직서의 진실성여부〓1일 오전 정몽헌 회장이 친필 사직서를 공개했지만 정몽구회장측은 이에 대해서도 의혹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정몽헌회장이 남북 경협사업에 주력한다는 것이 현대아산을 지주회사로 운영하면서 기존의 경영권을 유지하겠다는 뜻이 아니냐고 보고 있다.

정몽헌회장의 경우 대북 사업을 전담하면서 경영에서 완전히 발을 빼지 않지만 몽구회장은 다르다. 일단 회장직에서 물러나고 나면 경영에 다시 복귀할 여지가 별로 없다. 몽구회장이 극력 반발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현대차 내부에선 이번 3부자의 동반 퇴진 요구에 대해 “돌에 맞았다”는 분위기. 현대 사태가 불거진 것은 정몽헌회장 계열의 현대투신과 현대건설의 유동성 문제 때문이었는데 엉뚱하게 불똥이 정몽구회장에게 튀었다는 것.

▽최악의 시나리오는 지분대결〓정명예회장의 뜻이 ‘정몽구회장의 퇴진’이었고 정몽구 회장이 끝까지 반발할 경우 결국 주주총회에서 표대결을 벌이는 수밖에 없다. 현재 정몽구 회장의 현대차 지분은 4%로 우호지분인 현대정공의 7.8%를 합치면 11.8%다. 정명예회장이 최근 매입한 지분은 6.8%로 곧 9%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여기에 현대건설이 보유한 2.8%를 합치면 11.8%로 정몽구 회장과 지분이 같아진다.

그러나 정몽구 회장쪽은 자사주 추가매입여력이 2500억원에 달해 지분대결 면에서 한결 우세하다. 현대 내부에선 정명예회장이 있는 한 지분 대결 양상으로까지 번지지 않겠지만 단시일내 사태가 끝나지 않을 거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병기·홍석민기자>sm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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