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유동성위기]침묵의 '王회장' 최종선택은?

  • 입력 2000년 5월 30일 20시 19분


현대그룹의 창업주 정주영(鄭周永)명예회장이 퇴진압력에 몰려 있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그의 전매특허처럼 한평생 실패를 모르고 살아온 정명예회장에겐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정주영이 누구인가. 경제의 불모지대에서 대재벌 축성의 신화를 만들어낸 한국경제의 마지막 창업 1세대이자 한국경제의 한 중앙에 우뚝 서있는 거목이다.

‘불도저 경영’ ‘카리스마 경영’ ‘사막의 신화’란 그의 별명이 말해주듯 남들이 도저히 안된다며 포기한 일을 그는 훌륭하게 해냈다. 경부고속도로에서부터 베트남 진출 그리고 사우디 주베일항만 공사에 이르기까지 숱한 기적을 이뤄냈다.

그러나 지금 ‘왕회장’의 심사는 참담하다. 자식들의 불화로 현대가 만신창이가 된 것도 참기 어렵지만 경제거목으로서 ‘평생의 명예’를 지키기가 어렵게 된 현실이 원망스럽다.

20일 서울 종로구 계동 사옥 옆 원서공원에서 열린 현대건설 창립 53주년 기념 체육행사. 오랜만에 공식석상에 모습을 보인 정명예회장은 ‘와병설’을 잠재우기라도 하듯 건강해 보였다. 자신이 직접 세우고 키웠던 그룹의 모회사인 현대건설의 행사여서였을까. 왕회장의 얼굴에는 어느 때보다 흐뭇한 기색이 역력했다. 한판 겨루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나이 벌써 여든여섯. 젊은날 장사 소리를 듣던 용장도 세월의 흐름 앞에 어느덧 늙고 지친 노인이 돼 있었다.

그런데…. 시상식 때였다. 그는 아무도 예기치 못한 행동을 보였다. 회사측이 준비한 상금을 주는 순간, 자신의 품속에서 봉투를 하나 꺼냈다. 아마도 그럴려고 미리 준비한 듯 봉투를 상금에 얹어 건네줬다. 그는 ‘깜짝행동’으로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른다.

“나는 아직 이렇게 건재하다.”

그 장면은 재작년 6월 휴전선을 넘으면서 손을 흔들어보이던 그 당당한 모습과도 닮아 있었다.

‘정치 외도’에 나섰다가 정권의 괘씸죄에 걸려 숨죽이고 보내야 했던 ‘형벌 같은’ 5년간의 침묵기. 사람들은 그가 이제는 조용히 여생을 즐길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세인들의 생각을 몇 단계 뛰어넘는 세기의 이벤트를 연출하면서 화려하게 돌아왔다. 게다가 분단 반세기 동안 누구도 성공하지 못한 김정일과의 2번의 만남. 그리고 자신의 망향 염원이자 민족의 오랜 꿈이던 금강산 관광 선물.

그때 휴전선을 넘나들면서 전한 그의 목소리는 하도 작아 알아듣기도 힘들었지만 아직도 자존심을 잃지 않은 그의 눈은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살아있다. 이렇게 팔팔하게 살아 있다.”

정주영….

왕회장은 요즘 서울 종로구 계동 사옥 15층 집무실에 나오는 횟수가 뜸해졌다. 매일 아침 6시40분경이면 어김없이 사옥 옆 이발소에 나와 머리를 다듬고 15층으로 올라가는 그 모습 자체가 그에게는 스스로 건재하다는 시위였다. 그러나 ‘출근’ 횟수는 요즘 일주일에 한두번으로 크게 줄었다. 집무실에 나와도 회사 일을 챙기던 종전과 달리 요즘에는 서류 대신 창밖을 우두커니 내다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백전노병’은 지금 외로워보인다. 한국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그를 만나러 오는 이 방에서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서울 시내. 그가 직접 벽돌을 져나르기도 했던 건물과 아파트들이 노안(老眼)에 희미하게 들어온다.

문득 76년 2월16일, 그 ‘운명의 날’이 마치 어제일 마냥 생생히 떠오른다. 그날은 바로 세계 건설업계가 20세기 최대의 대역사로 불렀던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항만 공사를 현대건설이 따낸 날이었다.

그때도 그랬었다. 그가 처음 입찰에 뛰어들겠다고 했을 때 모두가 “안되는 일”이라며 말렸다. 그러나 “안된다”는 말은 그의 머릿속에 없었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어금니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나라는 사람의 생리”라면서 그는 밀어붙였다. 결국 그는 9억3000만달러짜리, 당시 우리나라 예산의 반에 해당하는 액수의 공사를 차지했다.

바다에 바지선을 띄워 공사설비를 울산에서 주베일까지 운반하자는 ‘황당한’ 구상도, 보험도 들지 않고 수십만리의 바닷길 운반을 결국 성공시킨 것도 모두 ‘정주영 신화’였다.

정주영은 늘 그런 사람이었다. 남들이 헤어나기 힘든 막다른 순간이라고 생각했을 때 항상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자동차 사업을 시작할 때는 또 어땠는가. 미국 포드사와 결별하고 독자모델을 만들겠다고 할 때 누군가 “현대가 자동차를 만들면 내 열 손가락에 불을 지르겠다”고까지 했었지만 정주영은 결국 그의 코를 납작하게 해줬다.

조선 불모지에서 겁없이 뛰어든 미포조선은 이제 세계 최대 조선소로 우뚝 섰다.

그러나 젊은 날 공사판 이력은 그에게 강인한 육체와 함께 관절염까지 주었다. 저 가슴 밑바닥에는 활화산 같은 열정이 남아 있는데, 부축을 받아야 걸을 수 있는 처지. ‘벤치’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 노병의 심정은 참담하다.

쇠약해지는 기력과 함께 그의 카리스마도 이제는 흔들리고 있다. 현대 주변에선 “지금 현대의 위기는 정주영 그 자신이 만든 것”이라는 말도 많이 들린다.

비판자들은 그의 제조업에 대한 집착이 오늘의 현대를 위기에 빠뜨렸다고 지적한다. “개발연대의 논리로 21세기 경영을 하려고 한다”는 볼멘 소리도 점점 커지고 있다.

한때 찬사를 듣던 초인적인 추진력은 이제 반대로 ‘무모하고 저돌적인 경영’으로 격하되기도 한다. ‘불가능을 가능으로’라는 그의 인생 모토는 현대의 ‘훈장’이 아니라 ‘덫’이었을 뿐이라고 얘기하는 현대맨들이 늘어나고 있다.

정주영…. 그는 이런 상황에서 계속 침묵을 지킬까. 그의 집무실에 내걸린 옛 사진들 속 한 풍경처럼 그는 그냥 사라지려는 것인가. 질풍처럼 내달려왔던 그의 시대가 저물어가는 것처럼 그도 조용히 물러가려는 것일까.

아니면, “아직도 내가 할일이 남아 있다”며 ‘회심의 승부수’를 들고 돌아올까.

그의 ‘말’이 궁금하다.

<이명재기자>mj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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