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대리들, 신규채용 끊겨 업무 폭증 "일할맛 안나"

  • 입력 2000년 1월 5일 20시 00분


H그룹 계열사 김모대리(35)는 요즘 근무가 끝나면 곧장 회사 근처 독서실로 달려간다. 대리 6년차로 최근 과장 인사에서 두번째 고배를 마신 그는 승진 탈락에 대한 울분을 삭이면서 인터넷 관련 벤처기업 창업을 준비 중이다. 입사 후 10년간 누구보다 ‘머슴’처럼 일했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대리’로 직장 생활을 마감하는 게 아쉽기는 하지만 다른 어떤 일을 하더라도 ‘고달픈 대리’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에 사직을 결심했다.

▽살인적인 업무 강도, 좁은 승진 문〓S그룹 계열사 안모대리(31)는 요즘 자신의 일 외에도 팀장의 컴퓨터 작업을 대신해주느라 녹초가 돼 퇴근하기 일쑤다. IMF 경제난 이후 신입사원 채용이 끊겨 벌써 2년째 자료정리에서 복사까지 허드렛일을 맡아하고 있지만 ‘컴맹’ 팀장을 둔 탓에 일거리가 하나 더 늘어난 것. 특히 최근 주식 열풍을 타고 대부분의 간부들 이 ‘재테크’ 등 가욋일에 열중하면서 간부들이 직접 챙겨야 할 일까지 도맡아 처리해야 한다. 일을 하는 만큼 권한이라도 주면 좋지만 권한은 여전히 ‘쥐꼬리’ 수준.

SK그룹 정모대리(32)는 “퇴근 후 영어나 컴퓨터 학원에 다니고 싶어도 하루 12∼14시간의 격무에 시달리기 때문에 공부는커녕 잠 잘 시간조차 모자라는 실정”이라며 “요즘 입사한 후배들은 상사의 눈치를 보지 않고 행동하는 신세대라 일을 떠맡길 수도 없다”고 말했다.

특히 갈수록 좁아지는 승진 문은 대리들의 사기를 꺾는 최대 요인. 기업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리에서 과장으로 승진하는 확률은 30%선. 2, 3년 전만 해도 7년에서 8년 정도면 과장이 될 수 있었지만 요즘에는 상위 직급이 크게 줄면서 인사 적체가 심화돼 10년차, 11년차 대리도 흔히 볼 수 있다. 연봉제가 보편화되면서 인사고과도 까다로워져 업무 외에 토익 토플 등에서 일정 점수 이상을 받지 못하면 승진은 꿈도 꾸지 못한다.

▽상대적 박탈감이 더 문제〓L그룹 이모대리(34)는 최근 대학 동창 모임에 나갔다가 인터넷 벤처기업으로 스카우트된 친구를 보고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연봉 2000만원 안팎을 받다가 두 배 이상의 연봉에 수억원대의 스톡옵션을 받고 자리를 옮긴 것.

이대리는 “30대 초 중반의 벤처기업 사장들이 신문 지상에 오르내리고 정보통신 기업에 취직해 우리사주로 수억원대의 ‘떼돈’을 번 친구들의 얘기를 듣노라면 자신이 무능하고 초라하게 느껴진다”며 “뭔가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만 여유가 없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일부 대리 중에는 이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과후나 주말을 이용해 부업을 하는 ‘투잡(TWO JOB)족’도 있다. 이들은 창업을 목표로 선후배가 운영하는 벤처기업에서 일을 배우거나 회사 몰래 소규모 인터넷 사업을 벌이는 등 탈출을 전제로 이중생활을 한다.

이대리는 “대기업 대리로 자부심을 느끼는 경우는 은행에서 대출받을 때뿐”이라며 “텅 빈 주머니를 말끔한 양복과 넥타이 뒤에 숨기고 텅 빈 가슴으로 살아가는 게 우리 사회 대리들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 훈기자>dreamlan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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