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사태 계기 정책당국의 「힘」 한계 드러나

  • 입력 1999년 7월 28일 23시 33분


‘시장이 정부를 이겼다.’

‘대우사태’ 이후 열흘동안 금융시장의 위력에 놀란 정책당국자들은 “시장의 신뢰를 잃으면 정책은 끝장”이라며 시시각각 시장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정부 내에 ‘시장의 힘’을 찬미하는 이른바 시장주의자가 갑자기 많아진 것.

금융시장이 안정을 되찾은 28일 강봉균(康奉均)재정경제부 장관은 “시장의 신뢰도는 증시를 통해 나타나는 국내외 투자자의 반응과 국내외 금융기관의 평가 등 시장이 냉엄하게 결정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다른 재경부 고위관계자는 “모든 문제는 시장원리로 풀어나가야 한다”며 “대우사태 초반에 외국인 투자가들에게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점이 금융불안을 야기한 것 같다”며 그동안 시장의 힘을 간과해온 정부의 잘못을 시인했다.

조원동(趙源東)재경부 정책조정심의관은 “정부는 시장과의 대화를 더욱 강화해나갈 것”이라며 “정부가 어떻게 움직이려고 하는지 분명한 메시지를 시장에 보낼 것”이라고 정책의 투명성을 강조했다.

금융감독위원회쪽도 마찬가지여서 “시장의 신뢰를 상실한 김우중(金宇中)대우그룹 회장의 경영권을 조기 박탈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정도다. 여러차례 약속을 어긴 대우가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마지막 수단으로 경영권을 내놔야 한다는 논리인 셈.

정책당국자들의 이같은 자세는 대우그룹 구조조정안을 발표하던 19일과는 사뭇 달라진 모습이다. 며칠 사이에 시장의 ‘뜨거운 맛’을 봤기 때문이란 풀이다.

당초 정책당국자들은 금융시장이 대우그룹 구조조정안에 대해 당연히 환영할 것이란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많은 당국자들이 “대우문제는 이미 금융시장에 충분히 반영돼 있고 정부가 구조조정에 대한 의지를 확고히 해왔기 때문에 주가상승 금리안정 양상이 나타날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여차하면 기관투자가를 통제할 수 있다는 오만과 자신감도 한몫했다.

이에 따라 강봉균장관, 이헌재(李憲宰)금감위원장은 금융시장을 배려하기보다는 ‘김우중회장은 퇴진하고 해외부채는 대우그룹이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대우 압박에만 열을 올렸다.

하지만 정부와 대우그룹을 신뢰하지 않은 시장참가자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결과는 23일의 사상최대 주가폭락과 금리폭등. 금융기관 등 기관투자가를 상대로 한 정책당국의 ‘윽박지르기’는 거의 통하지 않았고 개인과 해외투자자들은 정책당국을 불신했다.

결국 정책당국은 25일 시장이 요구하는 모든 조치를 내놓으며 금융시장에 백기를 들고 말았다. 이어 시장의 ‘처분’만을 기다리며 초조감 속에 피를 말리는 하루를 보냈다.

재경부 직원들은 26일 강봉균장관에게 1시간 단위로 주가 금리 환율동향을 분석해 보고해야 했다.

이한구(李漢久)대우경제연구소 사장은 “정부는 시장을 죽이는 일에는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시장 살리기에는 별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시장의 신뢰를 얻기 위해선 과거에 저지른 ‘잘못’보다 몇배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충고다.

〈임규진기자〉mhjh2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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