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超슬림 세계경영」 ABB를 배우자

  • 입력 1997년 10월 6일 07시 49분


세계적 산업전기업체인 ABB의 스위스 본사를 찾은 방문객들은 그 「초라한」 규모에 하나같이 놀란다. 이 회사의 지난해 매출은 3백63억달러(약 33조원). 그러나 1백40개국 1천여개의 현지법인을 관리하는 취리히 본부 4층 건물에는 고작 1백40여명만이 근무할 뿐이다. 번듯한 고층빌딩에 수십개의 계열사가 입주, 위용을 뽐내는 국내 재벌그룹들의 본사와는 영 딴판이다. 취리히 ABB본사가 「초(超)슬림」화한 것은 철저한 관료주의 배격과 현지화 덕택. 21만명의 임직원이 흩어진 전세계 사업장의 인사 및 재무문제는 대부분 몇단계 상위부서와의 협의를 거쳐 현지에서 해결한다. 현지화 척도인 각 지역 최고경영자 인사도 핵심 브레인 몇몇을 빼고나면 대부분 현지채용이다. ABB의 철저한 현지화를 상징하는 것은 「매트릭스(Matrix)」조직. 매트릭스의 한 축인 사업부문을 △발전 △송배전 △산업빌딩시스템으로 3분한 뒤 이를 30여개의 중간 사업영역, 1백여개의 하부 사업단위로 다시 나눈다. 다른 한 축에는 지역별로 크게 △유럽 중동 아프리카 △미주 △아태지역으로 나눠 60개 주요국으로 세분했다. 이에 따라 「A국가의 B사업단위」로 분류할 수 있는 수천개의 이윤센터가 생겨나는데 스위스 본사는 이 센터가 독자적으로 재무제표를 작성, 현지경영할 수 있도록 자율성을 보장했다. 이처럼 가장 현지화된 제조기업으로 공인된 ABB가 최근 국내기업들의 새로운 벤치마킹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상상을 넘어서는 현지화와 복잡한 사업단위를 일사불란하게 관리하는 불가사의(不可思議)에 매료된 탓이다. ABB배우기에 가장 적극적인 그룹은 대우. 세계화에 사운을 건 대우는 지난 여름 「세계화 추진위원회」를 가동하면서 벤치마킹 첫 대상으로 ABB를 지목했다.수십개 계열사가 각기 20여개 국가지역본부에 진출할 경우 예상되는 「조직충돌」을 미리 방지하고 관리의 노하우를 얻으려는 것. 대우의 ABB 연구성과는 연말 발표될 지역본부 구상에 집약된다. 국내 대그룹중 가장 현지화된 지역본부를 미주 유럽 중국 등지에서 가동중인 삼성도 ABB 조직관리와 현지화 사례를 집중연구했었다. 내수시장의 성장한계를 심각하게 느낄수록 해외에서 돌파구를 찾게 되고 이에 따라 ABB의 인기가 치솟는 것이다. 재계에서 일고 있는 ABB 배우기 붐은 그룹 총수들의 경영초점이 혁신 리엔지니어링과 함께 세계화에 맞춰지고 있음을 반증한다. 90년대 초 삼성 LG 등 대그룹의 최고 벤치마킹 대상은 미국 GE였다. GE는 80년대 초반 과감한 사업재구축(M&A)과 연이은 조직혁신 과정을 거치면서 경쟁력 있는 사업부문만으로 똘똘 뭉친 세계적인 성공모델. 문어발식 경영으로 지탄을 받았던 우리 그룹들로서는 금융 기계 소재 가전 등 첨단의 다각화경영을 자랑하는 GE의 장점을 캐내기 바빴다. 우리기업들의 GE배우기는 「1등만 살린다」는 적자생존 전략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난 상태. 그러나 ABB 따라하기는 결코 만만치 않다. ABB코리아의 한윤석(한윤석)부사장은 『매트릭스 조직은 단시일내 이뤄지는 실적 평가시스템과 현지채용인이 중심에 선 경영환경 때문에 효과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라고 평가하고 『경영실적을 종합하는 데만 한달씩 걸리는 대그룹 경영환경에선 ABB 벤치마킹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래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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