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서 풀 뜯어 먹는 소리? 비유 아닌 패장의 전술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6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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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
보급 없이 병사들에 풀 먹인 日 장군… 주술 같은 사고방식으로 작전 실패
소개된 대부분이 엘리트 코스 밟아… 부족한 역량에 감투 씌운 조직 문제
◇별들의 흑역사/권성욱 지음/576쪽·2만9800원·교유서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버마(현 미얀마) 주둔 제15군 사령관이었던 무다구치 렌야(왼쪽에서 두 번째). 그는 전선에 늘 기자들을 데리고 다니며 자신의 활약상이 신문에 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교유서가 제공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버마(현 미얀마) 주둔 제15군 사령관이었던 무다구치 렌야(왼쪽에서 두 번째). 그는 전선에 늘 기자들을 데리고 다니며 자신의 활약상이 신문에 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교유서가 제공
회사든, 군대든 조직에서 일하다 보면 시간이나 예산, 인력이 부족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상부에 어려움을 호소하거나 지원을 요청하면 습관처럼 듣는 말이 있다. “그런 거 다 있으면 누가 못 하나.” 1억 원이 필요한 참호 공사에 5000만 원만 주고, 일주일이 걸릴 일을 이틀 만에 하라고 하면 실무자의 선택은 뻔하다. 값싼 자재를 써서 겉모습만 그럴듯하게 포장한다. 평시에는 그렇다 쳐도, 전쟁이 나면?

전쟁사 연구자인 저자가 어떤 조직에서나 최악의 리더로 꼽히는 ‘부지런한데 멍청한’ 장군들의 이야기를 썼다. 물론 역사에 남을 정도로 전투에서 어마어마한 패배를 당한 장군들이지만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졌다는 사실이 아니라, 패배에 이를 수밖에 없게 만든 그들의 이상하고 괴이한 지휘 스타일이다.

“무다구치 렌야의 더욱 황당한 발상은 어차피 식량이 없어도 이 넓은 산에서 열매나 동식물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기 때문에 보급 준비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버마의 정글은 일본의 산이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무다구치 렌야는 병사들에게 풀을 먹는 적응 훈련을 시키기도 했다.”(제2장 ‘일본군은 초식동물, 쌀 없으면 풀 먹으면 되지’에서)

태평양전쟁 당시 버마(현 미얀마) 주둔 제15군 사령관이었던 무다구치 렌야. 그는 버마 지역에서 영국군과 연합군을 몰아내는 임팔작전을 주도했지만, 출전했던 10만 명 중 1만2000여 명만 살아 돌아오는 사실상 전멸을 당한다. 승패는 병가지상사라지만 그의 문제는 패배 자체가 아니라 제대로 된 작전도, 보급도 없이 밀어붙이면 이긴다는 주술 같은 사고방식과 지휘 스타일이었다. 전투를 앞둔 부하들에게 “총알이 없으면 맨손으로, 그것도 쓸 수 없으면 물어뜯는 게 황군 정신”이라고 했으니 제정신일까. 더 나아가 부족한 보급을 보완하기 위해 병사들에게 풀을 먹는 훈련까지 시켰으니 이기는 게 더 이상할 지경이다.

미국 육군의 로이드 프레덴들 중장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독일의 로멜에게 전차 183대와 및 차량 600여 대가 격파되고, 사상자 3000여 명에 더해 3700여 명이 포로가 되는 참패를 당한다. 오죽하면 보고받은 루스벨트 대통령이 “우리 병사들이 싸움할 줄은 아는가?”라고 반문했을까. 프레덴들에 대한 주변의 평가는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지만 근거는 없는, 사령부를 떠나지 않으면서도 현지 상황을 잘 아는 부하들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무다구치나 프레덴들, 또 책에 소개된 다른 장군들 대부분이 엘리트 코스를 밟았으며, 실체가 드러나기 전까지는 인재로 평가받았다는 점이다. 물론 이들이 졌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가혹한 평가를 받는 것일 수도 있다. 저자는 개인적인 문제도 있지만, 그들의 역량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감투를 씌워준 조직에 더 큰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회사든, 군대든, 나라든 마찬가지다. 웃으면서 보고 있겠지만, 당신의 얘기일 수 있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별들의 흑역사#패장의 전술#부족한 역량#감투 씌운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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