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뒷날개]상상할 수 있나요… 먹이가 된 기분을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3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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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어에게 끌려가다 탈출한 저자
“먹고 먹히는 것은 자연의 이치”
◇악어의 눈: 포식자에서 먹이로의 전락/발 플럼우드 지음·김지은 옮김/280쪽·3만 원·연두

미국 만화가이자 환경운동가인 게리 라슨이 그린 만화의 한 장면은 이렇다. 강가에 두 마리의 악어가 누워 있다. 주변에는 부서진 작은 배, 찢어진 옷, 안경이 널려 있다. 불룩한 배와 만족스러운 표정의 악어는 회상한다. “정말 최고였어! 하얗고 부드럽고 즙이 많았어.”

‘악어가 인간을 먹었다.’ 만화는 악어 입장에서 이 상황을 유머러스하게 그린다. 실제로 먹힌 인간 입장에서는 끔찍했을 것이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호주의 페미니스트 철학자 발 플럼우드(1939∼2008)는 이를 들여다봤다.

플럼우드는 자신도 악어에게 물려서 죽을 뻔했다. 1985년 호주 북부 카카두국립공원에서 혼자 카약을 타다가 악어의 습격을 받아 ‘죽음의 회전’을 세 번 겪은 것이다. 악어가 먹이의 숨통을 끊으려 물속에 끌고 들어가는 걸 죽음의 회전이라고 한다. 심각한 부상을 입고도 목숨을 건진 플럼우드는 200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사건의 의미를 곱씹었다.

악어로부터 탈출한 것도 놀랍지만, 플럼우드가 이 사건을 이해하는 방식은 더 놀랍다. 그는 악어의 입에 들어갔을 때 경악했다. 단지 죽음의 공포만이 아니라 ‘내가 먹잇감이 되었다’는 게 충격이다. 화가 치밀고 믿을 수 없었기에 플럼우드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여기까지는 비일상적인 사건 앞에서 누구나 보일 법한 반응이다. 플럼우드의 생각은 더 나아간다. ‘내가 먹잇감이 된 것은 현실인데 왜 받아들이지 못할까?’

역지사지란 늘 쉽지 않지만 지구의 지배자로 우뚝 선 인간이 먹잇감 입장이 되는 건 정말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악어와의 조우 이전에도 환경운동가로 활동한 플럼우드는 자신이 악어에게 먹힐 뻔한 사건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사실에 놀란다. 인간중심주의를 줄기차게 비판해온 사상가로서도 먹이로 전락한 처지를 받아들이기란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인간이 호랑이나 악어뿐 아니라 벌레와 미생물의 먹이가 되는 과정은 생태계에서 얼마든지 일어나는 일이라는 추상적 지식을 몸으로 체험한 플럼우드는 말한다. “이 가혹한 세계를 제 것으로 인정하고 그와 화해하는 일은 큰 투쟁이었습니다.”

인간도 먹이가 될 수 있다는 자각은 무소불위의 권력자로 군림하며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죽여 온 인류의 위치를 근본적으로 상대화시킨다. 플럼우드는 구조된 뒤 “무작위로 복수하는 것은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다”라며 자신을 공격한 악어를 죽이지 말아 달라고 요구했다.

이 책은 호주의 대자연에서 길러진 플럼우드의 체험과 사유를 두루 살펴볼 수 있는 유고집이다. 플럼우드는 서로가 먹고 먹히는 자연을 분노나 연민 없이 직시하자는 메시지를 전한다. 생태철학이 재조명받는 기후변화의 시대다. 저자의 사유를 요즘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길고양이 먹이 주기를 둘러싼 갈등이나 채식과 육식에 대한 논쟁에도 적용해 보면 어떨까.


신새벽 민음사 편집부 인문사회팀장
#환경운동가#게리 라슨#악어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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