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당신을 울린 그놈…책 속에 가둬라”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2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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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 문단 성폭력 폭로한 작가 바네사 스프링고라 서면 인터뷰
피해 악몽에 살인-복수 꿈꿔… 청소년기 자녀들 보며 폭로 결심
기득권 지키려는 자들 저항 거세, 성폭력 증언 절대 포기하면 안돼

장편소설 ‘동의’를 통해 그루밍 성폭력을 고발한 바네사 스프링고라. 그는 “단어 ‘동의’에 대한 정의는 그리스 스토아 철학자들이 내린 게 가장 온당하다. 죽는 데 동의한다는 문장은 기쁘게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다는 뜻”이라고 밝혔다. 은행나무 제공
장편소설 ‘동의’를 통해 그루밍 성폭력을 고발한 바네사 스프링고라. 그는 “단어 ‘동의’에 대한 정의는 그리스 스토아 철학자들이 내린 게 가장 온당하다. 죽는 데 동의한다는 문장은 기쁘게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다는 뜻”이라고 밝혔다. 은행나무 제공
지난해 1월 프랑스에서는 1980년대 파리를 배경으로 13세 소녀 ‘V’와, 그를 상대로 수년에 걸쳐 그루밍 성폭력을 저지르는 50대 남성 작가 ‘G’의 이야기가 출판됐다. 프랑스 쥘리아르 출판사의 대표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인 저자 바네사 스프링고라(49)는 책에서 이 작품이 자전적 소설임을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출간과 동시에 프랑스 문단과 독자들은 이 소설이 대문호 가브리엘 마츠네프(85)의 과거 성폭력을 폭로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저자의 첫 장편소설인 ‘동의(Le consentement)’는 예술가의 자유라는 미명 아래 미성년자에 대한 성착취에 눈감았던 프랑스 문단의 위선을 고발하는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이 책은 프랑스에서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고 3개월 만에 18만 권이 판매됐다.

‘동의’는 국내에서도 은행나무 출판사를 통해 1일 출간됐다. 스프링고라 작가와의 서면 인터뷰를 통해 집필을 결심한 계기와 문단계 성폭력에 대한 생각을 들었다.

○ 가해 작가를 책 안에 가두기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갓 청소년기에 접어든 아들딸의 모습이었어요.”

30여 년간 가슴에 품고만 있었던 성폭력 피해 경험을 글로 옮기게 된 이유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아이와 성인의 경계에 접어든 자녀들은 저자가 처음 그루밍 성폭력에 노출됐던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성인의 욕망을 지녔지만 한없이 취약한 10대의 특성을 가까이에서 보며 저자는 어린 자신 역시 얼마나 무방비한 존재였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피해의 기억을 되살려 문장으로 옮기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당초 저자는 고통을 줄이기 위해 허구의 인물을 앞세워 글을 쓰려 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저자는 “결국 1인칭으로 써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2017년 2년 만에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책을 쓰는 건 문단계 성폭력 피해자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반격이기도 했다. 가해 작가는 성폭력 피해자들과 있었던 일들을 작품 소재로 자주 활용했고 이는 고스란히 2차 피해가 됐다. 저자는 서문에서 “너무도 오래전부터 우리 안에 갇혀 맴돌며, 살인과 복수가 우글대는 꿈을 꿔왔다”며 사냥꾼이 쳐놓은 올가미로 사냥꾼을 잡는 것처럼 그(가해 작가)를 책 안에 가두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선언했다.

○ “권력형 성폭력 폭로 계속돼야”


한국에서 문단 성폭력 폭로는 2016년 나왔고, 2018년 최영미 시인의 시 ‘괴물’이 이를 본격적으로 고발하는 신호탄이 됐다. 최 시인의 행동은 문단계 ‘미투(#MeToo·나도 당했다)’로 이어졌지만 프랑스에선 아직까지 추가 폭로가 나오지 않았다.

저자는 “출판사들이 판매 중이던 마츠네프의 책을 회수했고 2013년 그에게 문학상인 르노도상을 수여했던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 사임하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다”면서도 “문단은 여전히 비밀스러운 영향력에 의해 지배되고 있어 또 다른 폭로로 번지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2017년에는 대만에서도 문단 내 성폭력을 다룬 소설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이 발표됐다. 저자 린이한은 “실제 이야기를 다룬 자전적 소설 아니냐”는 문단과 독자들의 추궁에 시달리다 출간 두 달 만에 26세의 나이로 목숨을 끊었다. 반면 가해자로 지목된 유명 문학 강사는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다.

스프링고라는 “때로 기득권을 지키려는 이들의 저항은 극복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이런 유형의 학대를 증언하는 것은 피해자에게 용기를 주는 일이다.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문단계#성폭력#해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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