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여년간 뒤바뀐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 국가지정 ‘보물’ 됐다

  • 뉴시스
  • 입력 2018년 10월 30일 11시 58분


코멘트
신라 금귀걸이, 조선 서책, 불교 조각상이 국가 지정 문화재가 됐다.

문화재청은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慶州 皇吾洞 金製耳飾)를 보물 제2001호, ‘이익태 지영록(李益泰 知瀛錄)’을 보물 제2002호, 이형상(1653∼1733)의 ‘남환박물지(南宦博物誌)’를 보물 제652호, 남양주 불암사 목조관음보살좌상(南楊州 佛巖寺 木造觀音菩薩坐像)‘을 보물 제2003호로 지정했다.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는 1949년 경주 황오동 52호분에서 출토된 귀걸이 한 쌍이다. 외형상 주고리, 중간장식, 마감장식의 삼단으로 구성된 신라 시대 5~6세기에 해당하는 전형적 유물이다.

접합 부위가 세밀해 눈으로는 잘 확인되지 않을 만큼 세공 기술이 뛰어나고 작은 구슬 장식도 섬세하고 아름답다. 입체형인 펜촉형 장식물 안팎으로 작은 금 알갱이를 촘촘히 붙여서 표현된 시각적 화려함이 특징이다.

이 귀걸이는 신라 시대 경주에서 만든 전형적 귀걸이 형태라는 점, 제작기법과 조형성이 우수하고 펜촉형 장식물의 창의적 형태와 입체감이 돋보이는 점이 신라 고분 금속공예품 대표작으로 꼽을 만하다. 신라 장신구 발전과 변화를 고찰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익태 지영록‘은 제주목사를 역임한 이익태(1633~1704)가 1694년 7월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래 1696년 9월까지 재임기간에 업무, 행적, 제주 관련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이익태는 서문에 제주목사를 역임하면서 알게 된 제주도의 열악한 생활상과 누적된 폐단을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참고하기를 바라며 기록으로 남겼다고 한다.

내용은 이익태가 제주목사로 부임하기까지 여정, 재임기간 중 공무수행, 제주도 부임시 행적, 그 과정에서 지은 시·제문·기행문이다. 특히, 제주와 관련 여러 기록물과 조선인을 포함한 일본인, 중국인, 서양인의 표류에 관한 기록을 비중 있게 다뤘다. 1687년 제주도민 김대황이 출항 후 파도에 휩쓸려 베트남(安南)에 이르렀다가 귀국한 여정을 기록한 ’김대황표해일록(金大璜漂海日錄)‘은 조선 시대 베트남 관련 기록으로 희소성이 있다.

이 책은 제주도 문화와 지명 연원을 이해하는 데에 실질적이고 중요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외국인 표류 상황이 기록되어 있어 조선 시대 표류민 정책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높다.

이형상(1653∼1733)이 1704년 기록한 보물 제652호 ’남환박물지(南宦博物誌)‘보다 8년 일러 연대가 가장 앞서는 제주도 최초 인문지리지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남양주 불암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은 17세기 전반기에 활발하게 활동한 대표 조각승 무염을 비롯해 총 조각승 5명이 참여해 1649년 완성한 불상이다.

높이 67㎝의 불상은 머리에 연꽃과 불꽃문양으로 장식된 화려한 보관을 썼다. 가사는 두벌 겹쳐 입은 모습에 상반신을 앞으로 구부렸다. 전체적으로 비례가 알맞고 신체의 자연스러운 양감이 돋보인다.

얼굴은 이마가 넓고 턱으로 내려가면서 좁아져 역삼각형을 이루었으나, 날렵하고 갸름하게 처리한 턱선, 높게 돌출된 코, 자비로운 인상에 실재감 있는 이목구비 표현 등 1650년대 전후로 아담하고 현실적 조형미를 추구한 무염이 참여한 작품 특징을 잘 보여준다.

정확한 제작 시기와 봉안처를 알 수 있고, 보존상태도 비교적 양호해 17세기 중엽 불교 조각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다.

’서울 칠보사 목조석가여래좌상‘은 1622년 광해군의 부인인 문성군부인 유씨가 왕족들과 친정 부모의 천도를 목적으로 발원해 왕실 원찰인 자수사와 인수사에 봉안한 11존 불상 중 하나로 추정된다. 17세기 대표적 조각승 현진, 수연, 응원, 인균 등 당대 유명 조각승들이 합작해 만든 불상으로, 조각승들의 제작 특징이 복합적으로 반영된 작품이다.

머리와 상반신을 앞으로 약간 숙인 자세에 오른손은 땅을 가리키고 왼손은 다리 위에 둔 항마촉지인을 한 모습이다. 상반신은 허리가 짧고 어깨가 넓다. 하반신은 다리가 높고, 턱을 수평으로 깎은 네모진 얼굴에 양 볼이 볼록하게 양감이 살아 있다. 작고 가는 눈에 오뚝한 코, 미소가 있는 작은 입 등 단정하고 인자해 보이는 인상은 현진과 수연의 다른 작품에서도 볼 수 있는 특징이다.

기법이 화려하지 않고 비교적 간결하지만 중후한 기품과 위엄이 느껴지며, 17세기 전반 불상 중에서 수준 높은 작품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문화재청은 보물 제455호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慶州 皇吾洞 金製耳飾)‘를 ’경주 노서동 금귀걸이‘로 이름을 바꿨다. ’경주 노서동 금귀걸이‘는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와 더불어 신라 시대 장신구의 대표적 사례로 알려진 작품이다. 보물 제455호가 1966년 일본에서 환수된 ’경주 노서동 금귀걸이‘임에도 불구하고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로 인식되어 온 것을 바로잡는 조치다.

경주 노서동 출토 지정문화재 3점인 금팔찌, 금귀걸이, 금목걸이가 각각 보물 제454호, 제455호, 제456호로 차례로 지정번호가 연계됨에 따라 효율적 보존관리 기반을 갖추게 됐다.

【서울=뉴시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