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상근]‘헬조선’과 단테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8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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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라는 젊은 세대… 불온한 조짐이자 병리현상
14세기 ‘헬 이탈리아’의 단테… 끔찍한 경험 바탕으로 ‘신곡’ 집필
용기 준 정신적 스승 덕에 가능… 야수 같은 욕심뿐인 사회지도층
‘헬 조선’ 아니라고 강변할 수 있나

김상근 객원논설위원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
김상근 객원논설위원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
동아일보 기자 출신의 젊은 소설가 장강명이 박람강기(博覽强記·동서고금의 책을 두루 읽고 잘 기억함)하여 쓴 ‘한국이 싫어서’란 책이 화제다. 대한민국의 너절한 국가주의와 사회적 차별에 염증을 느끼던 주인공 젊은 여성이 호주로 이민을 감행한다는 내용이다. 대개 이런 자조적인 사회적 현상을 제목으로까지 밀고 있는 문학은 과부하가 걸리기 일쑤지만 20, 30대의 90.6%가 한국을 ‘헬조선’이라 부르는 데 동의한다는 통계에 접했을 때, 이것은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직감하게 된다.

정말 불길한 징조다. 관점에 따라서는 ‘불온한 조짐’으로까지 표현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한 사회적 병리현상을 드러내고 있다. 지금 이 땅의 젊은이들은 자신의 지리적 환경을 ‘헬(Hell·지옥)’이라 부르고 있고, 자신의 시대적 환경을 봉건왕조의 구태와 부조리가 만연했다는 ‘조선’과 동일화하고 있다.

지옥은 죽어서야 가는 곳이다. 그런데 젊음의 환희를 구가하며 살기에도 시간이 부족해야 할 눈부신 청춘들이 자신의 시대와 환경을 ‘죽어서야 가는’ 지옥으로 느끼고 있다니, 숨이 턱 막혀 온다. 이 일을 어찌할꼬! 서울대 김난도 교수는 ‘아프니까 청춘이다’ 식의 위로를 건네는 방식을 선택했고, 숭실대 남정욱 겸임교수는 ‘차라리 죽지 그래’라는 독설로 젊은이들의 헬조선 논리에 역공을 펼친 바 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젊은이들 외에 죽어서야 가는 지옥을 살아서 경험했던 사람이 딱 한 명 있다. ‘신곡’의 저자 단테(1265∼1321)였다. 1300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700여 년 전에 단테는 이탈리아에서 지옥같이 누추한 삶을 살아서 견뎌야만 했다. 헬조선의 원조 격인 ‘헬 이탈리아’가 펼쳐진 셈이다.

단테는 그 끔찍한 경험을 바탕으로 문제작 ‘신곡’을 썼다. 그도 자신의 시대를 지옥이라 불렀고, 그 지옥의 입구에는 “이곳에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는 문패가 걸려 있었다는 묘사로 지옥으로의 여정을 시작한다. 소설 ‘한국이 싫어서’에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이 조국을 떠나면서 보았을지도 모를 인천공항의 입간판도 그런 것이었을까? 21세기의 대한민국을 지옥이라 부르는 젊은이들이나 14세기의 이탈리아를 지옥으로 불렀던 단테는 동일하게 지옥을 희망이 없는 곳이라 보았다.

살아서 지옥을 경험했던 단테에게 그래도 단 하나의 희망이 남아 있었다면 그것은 좋은 스승, 인자한 인생 선배의 격려와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지옥의 입구에서 단테는 공포에 떨고 있었다. 희망을 버려야 하는 지옥의 숨 막히는 현실이 그의 마음을 옥죄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곁에는 참스승 베르길리우스가 있었다.

베르길리우스는 단테가 숨 막히는 지옥의 고통 속에서 좌절할 때마다 용기를 북돋워 주고 희망의 끈을 놓치지 말라고 격려해 준 인생의 선배였다. 지옥의 입구에서 주춤거리고 있을 때, 베르길리우스는 인자한 손을 단테에게 내밀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의 손을 잡아 주었다. 지옥 같은 현실에서 좌절하고 있던 단테를 향해 ‘얼굴에 미소를 띠며’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그 덕분에 기운을 차린 단테는 스승의 손을 잡고 함께 ‘비밀스러운 곳’으로 들어가게 된다.

베르길리우스와 같은 스승이 있었기에 단테는 지옥과 같은 현실을 견뎌낼 수 있었다. 지옥의 비참함 속에서도 단테가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았던 이유는 베르길리우스와 같은 인생의 선배가 있었기 때문이다. 짙은 숲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던 단테에게 “네가 이 짐승들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인생의 방향을 돌리는 것”이라 조언해 주던 베르길리우스가 있었기 때문에 단테는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대한민국을 헬조선이라고 부르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어른들이, 인생의 모범을 제시해야 할 우리 사회의 지도층이, 베르길리우스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는커녕 권력에 대한 욕심만 야수처럼 드러내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라도 서슴지 않고 해대는 요즈음, 무슨 염치로 21세기의 대한민국이 헬조선이 아니라고 강변할 수 있을까? 베르길리우스는 단테의 손을 잡아주며 용기를 내라고 격려해 주었는데 우리 기성세대들은 지금 좌절하고 있는 젊은이들의 팔을 뒤로 꺾고 더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 너희 잘못이라고 윽박지르지 않았던가? 그대로 있으라고 강요하지 않았던가?
 
김상근 객원논설위원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
#헬조선#단테#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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