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가리꾼-똥방위 말년 번역하기 너무 어려워”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5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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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데버러 스미스’ 지망 번역가와 성석제 작가 번역수업 현장

소설가 성석제 씨(왼쪽에서 네 번째)와 번역아카데미 수강생들이 작품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영미권 독자는 한 문장의 단어가 14개를 넘기면 집중력이 떨어진다. 긴 문장은 끊어서 번역해도 되느냐”는 질문에 성 씨는 “해당 언어 위주로 번역해야 한다. 원문을 고집하면 이도 저도 아닌 외계어가 될 것”이라고 답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소설가 성석제 씨(왼쪽에서 네 번째)와 번역아카데미 수강생들이 작품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영미권 독자는 한 문장의 단어가 14개를 넘기면 집중력이 떨어진다. 긴 문장은 끊어서 번역해도 되느냐”는 질문에 성 씨는 “해당 언어 위주로 번역해야 한다. 원문을 고집하면 이도 저도 아닌 외계어가 될 것”이라고 답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여기 ‘인형이 가득한 방 안’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인형은 어떤 모양인가요?” 27일 서울 강남구 한국문학번역원 강의실. 번역아카데미 정규과정(2년) 수강생 6명이 소설가 성석제 씨(56)에게 단편소설집 ‘이 인간이 정말’에 나온 ‘홀린 영혼’에 대해 물었다. 미국, 영국, 캐나다에서 온 외국인과 한국인 수강생들이 작품을 영어로 번역한 후 작가와 논의하는 시간이었다. ‘홀린 영혼’은 허풍과 거짓으로 점철된 친구 이주선의 삶을 화자의 시선으로 좇는 작품이다. 성 씨가 “인형은 곰, 개구리 등 다양한 모습이죠”라고 답하자 “영어권에서는 ‘doll’이라고 하면 대개 사람 모양의 인형을 떠올리거든요”라는 설명이 돌아왔다. 성 씨는 미처 몰랐다는 듯 “아…, 그렇군요”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말의 맛, 생활상 집요하게 분석

한강 씨의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을 한 데에는 뛰어난 작품성과 함께 데버러 스미스 씨의 번역도 한몫했다. 스미스 씨처럼 한국어를 배운 원어민 번역가에게 관심이 쏠리고 있다. 번역아카데미는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 7개 언어권별로 수업을 진행한다.

이날 수강생들은 단어의 의미부터, 문맥은 물론이고 소설의 배경인 1960, 70년대 주택가와 다방, 기차역 구조까지 파고들었다. “주선의 아버지가 ‘우리 주선이 많이 사랑해주고’라고 말하는 대목은 영어로 그대로 옮기면 동성애 분위기가 난다”는 질문도 나왔다. 성 씨가 답했다. “한국의 어떤 아버지도, 설사 자신이 동성애자라 하더라도 그런 부탁은 안 하죠. ‘잘 돌봐 달라’는 의미를 문어체적으로 쓴 거예요.”

수강생들은 “‘노가리꾼, 똥방위 말년’…. 또 ‘똘똘이 목욕시켜준 지 얼마나 됐냐’는 어떻고요”라며 흘러간 은어의 말맛을 살리는 것이 특히 어려웠다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 문화, 관습 완벽히 이해해야

이들은 가축시장, 상설시장이 구체적으로 어떤 시장인지, 고유명사인지도 궁금해했다.

“한국의 시장에 대해 알아야 하는데…. 5일장은 아세요? 닷새에 한 번 열리는 시장이에요. 가축시장은 5일장에서 열리고요. 상설시장은 계속 영업하는 시장이죠. 일반명사예요.”(성 씨)

동네 어른이 주선에게 “김 사장 아들 아니냐”고 묻자 이 씨인 주선이 고개를 끄덕이는 대목에서도 수강생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 씨를 김 씨라고 하고, 당사자도 부인하지 않는 게 의아하다는 것. 성 씨는 감탄하며 설명을 이어갔다.

“한국에서는 흔한 게 ‘김 사장’이에요. 사람들은 실은 서로에 대해 정확히 몰라요. 주선도 굳이 이 씨라고 말하지 않죠. 피상적으로 알고 지내는 모습을 묘사한 장치인데 예리하게 집어내네요!”

영국에서 만난 한국인 친구를 통해 자연스레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됐다는 팀 홈 씨(32)는 “재미있을 것 같아 번역에 도전했다”며 “그림책을 번역하고 싶다”고 말했다. 미국인인 캐리 미들디치 씨(27·여)는 “김중혁 작가의 ‘미스터 모노레일’은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재미있는 작품이라 꼭 번역하고 싶다”고 말했다.

두 시간 반의 수업이 끝난 후 성 씨는 말했다. “번역이 굉장히 정교한 작업이네요! 소년 시절 읽은 세계문학전집은 영혼의 자양분이었어요. 낯선 세계가 주는 즐거움 속에서 위로를 얻고 각성도 했죠. 국경을 넘어 단 한 명의 소년이라도 나와 같은 경험을 한다면 소설을 쓴 보람이 있습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데버러 스미스#영어 번역#소설가 한강#채식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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