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서재’…한자, 한자 써가며 아빠를 더듬어갔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12일 18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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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이 지났다, 아빠가 하늘나라로 떠난 지도. 빈자리는 컸지만 아빠가 ‘자신’의 일부를 남겼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서재에 꽂혀진 수많은 책을 통해….

2011년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난 출판평론가 고(故) 최성일 씨의 아내 신순옥 씨(45), 딸 서해 양(15), 아들 인해 군(11)의 이야기다.

●아빠의 서재

아이들은 좀처럼 아빠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잊어버린 것처럼,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엄마는 서운했다. “아빠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하면서 기억해주면 좋을 텐데….”

지난해 초, 신 씨는 남편이 일하던 출판전문잡지 ‘기획회의’에 책과 관련한 글을 연재하게 됐다. 그는 아이들과 함께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아이들 내면의 빈 자리와 상처를 어떻게 드러낼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그래야 오히려 치유가 된다고 봤어요. 남편도 항상 말했죠. 글을 쓰면서 감정을 감추지 말고 솔직히 드러내라고요.”

아이들은 의외로 엄마의 뜻을 순순히 따랐다. 인해 군은 “엄마를 도와줘야 한다는 마음”이었다고 나중에서야 속내를 밝혔다. 책은 따로 살 필요는 없었다. 109㎡ 넓이의 집에는 ‘아빠의 책’이 무려 1만권 넘게 있었다. 거실은 물론 각 방, 복도 양쪽에 있는 책꽂이에는 매 칸마다 두 겹으로 책이 빼곡했다. 격주마다 함께 독후감을 쓸 책을 함께 골랐다.

“어릴 때는 장난감도 아니고 책이 많은게 왜 좋다는 건지 몰라 불평했지만 이제는 ‘책들이 다음에 귀중한 자산이 될 거야’란 아빠 말씀을 조금씩 이해하고 있어요.”(서해)

7개월 동안 세 가족은 ‘우리 가족입니다’, ‘어린 왕자’, ‘만희네 집’ 등 총 21권의 책을 읽은 뒤 생각을 나누고 독후감을 썼다.

●아빠의 책은 ‘아빠’

쉽게 꺼낼 수 없던 이야기도 책을 매개로 술술 풀어놓게 됐다. 신 씨는 제일 먼저 ‘아빠’를 주제로 다루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몇 권의 책을 읽은 뒤에야 아빠를 잃은 한 아이의 성장기를 다룬 ‘아빠 보내기’(박미라)를 함께 읽을 수 있었다. 아이들은 책을 읽으며 침울해하기도 하고, 가끔 북받치는지 눈가를 훔쳤다. 세 가족은 한자, 한자 글을 쓰며 아빠를 더듬어갔다. 독후감이 완성된 후 엄마는 아이들의, 아이들은 엄마의 마음을 알게 됐다.

“아빠 때문에 기운 없어 보이는 엄마 때문에 걱정 많이 했다. 엄마가 아빠처럼 우리만 두고 훌쩍 사라져버릴까 봐, 아직도 나는 무섭다…. 가끔 아빠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아이들 보면 울컥 올라온다. 어렸을 때의 나랑 아빠 같아서…. 살짝 말을 걸어보고 싶기도 하다. 아빠한테 말하듯이. 미안하다고, 고맙다고.”(서해의 독후감)

인해 군은 아빠와 함께 레고를 만들던 기억을 되새기며 ‘꿋꿋이 살아야겠다’고 썼다. 신 씨도 독후감을 읽고서야 아이들이 아빠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꺼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아이들의 입을 막은 건 남편 얘기만 나오면 침울해 했던 나 자신인 것을 몰랐어요.”

세 가족에게 글쓰기는 서로의 내면을 확인하고 가장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이었다. 이들은 글 쓴 과정과 독후감을 묶어 ‘아빠의 서재’(북바이북)를 최근 펴냈다. 서해 양이 책 표지 그림을 직접 그렸다. 이 책은 최 씨의 기일(2일)에 영전 앞에 놓였다.

8일 기자는 인천 남동구 자택에서 이들을 만났다. 그날도 아빠의 서재에 있는 책은 아이들의 손때가 쌓여가고 있었다.

“엄마, 다음 책 제목을 ‘아이들의 책꽂이’로 해요.”(인해)

“아니야. 인해가 빨리 결혼해서 손자를 낳으면 ‘할머니의 서재’로 하자. 호호호~.”(신 씨)

김윤종기자 zoz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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