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7년 朝日 국교회복… 을미사변-3·1운동 일어나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2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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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양의 해 어떤 일 있었나

양이 평화를 상징하기 때문일까. 수많은 외침을 겪은 우리 역사에서 양의 해는 평화와 관련이 깊었다. 1607년 정미년(丁未年)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단절된 일본과 국교를 전격 회복하고 통신사를 파견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10년이 흐른 뒤였다.

이후 조선은 1811년까지 12번에 걸쳐 통신사를 일본에 보내 대대적인 문화 교류의 장을 마련했다. 근대화된 일본이 침략에 나서기 전까지 250년 동안 양국은 평화를 지속할 수 있었다.

내년은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이 되는 해다. 1965년 극심한 반대 여론을 뚫고 정부는 일본 측과 한일 청구권 협정을 맺어 국교를 정상화했다. 일본의 침략을 받고 나서 양국이 관계 회복의 첫걸음을 뗀 시기가 모두 양의 해였던 셈이다.

양은 좀처럼 싸우는 일이 없지만 일단 성이 나면 누구도 말리기 힘들다고 했던가. 기미년(己未年)이던 1919년 한민족은 일제에 대한 의분을 3·1운동과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으로 분출했다.

앞서 같은 기미년인 1019년에는 고려시대 명장 강감찬이 거란의 대대적인 침략에 맞서 대승을 거둔 ‘귀주대첩’이 있었다.

종교적으로 상서로운 동물로 여겨지는 양의 해를 반영하듯 527년 정미년에는 이차돈의 순교에 힘입어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됐다. 이어 647년 정미년에는 천문대 혹은 종교적 제의시설로 추정되는 첨성대가 우뚝 섰다.

역사에 명암이 있듯 양의 해에는 민족사적 비극도 있었다. 1895년 을미년(乙未年)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주도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이후 한반도는 러시아까지 가세해 열강들의 각축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한일#1607#을미사변#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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