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알 탄 사회에서 느림의 가치를 일깨우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5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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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빈 페스티벌, 현대의 관습 통박한 작품들 돋보여

‘당나라의 승려’에서 현장법사가 잠든 가운데 미술가가 종이를 목탄으로 새카맣게 칠한 후 지우개로 초승달을 그리고, 목탄으로 덧그림을 그리고 있다. 불경을 구하기위해 현장법사가 밤낮으로 이어간 고행을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빈 페스티벌 제공
‘당나라의 승려’에서 현장법사가 잠든 가운데 미술가가 종이를 목탄으로 새카맣게 칠한 후 지우개로 초승달을 그리고, 목탄으로 덧그림을 그리고 있다. 불경을 구하기위해 현장법사가 밤낮으로 이어간 고행을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빈 페스티벌 제공
붉은색 승복을 입은 현장법사가 길이 8m, 폭 4m의 하얀 종이 위에서 잠잔다. 목탄을 든 미술가는 종이에 거미를 그리기 시작한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거미줄을 내뿜는 거미를 스무 마리 그린 후 미술가는 갑자기 목탄으로 종이를 모두 새카맣게 덮어 버린다. 세계적 예술 축제인 빈 페스티벌에서 16일 공연된, 대만의 유명 영화감독이자 공연연출가인 차이밍량(蔡明亮·57)이 만든 ‘당나라의 승려’는 시간이 정지된 듯 고요한 가운데 현장법사가 인도로 불경을 구하러 간 과정을 명상하듯 묘사했다.

올해 빈 페스티벌은 속도, 물질, 권력을 추구하는 현대 사회를 비판하며 느림, 삶의 가치를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 많았다. 형식을 파괴하고 연극 음악 영상 무용 등 여러 장르를 융합하는 경향은 더 강해졌다. ‘당나라의 승려’는 차이밍량의 페르소나(예술적 분신)인 리캉성(李康生·46)이 현장법사 역을 맡아 기나긴 고행 과정을 여백이 많은 동양화처럼 펼쳐냈다. 물을 마시고, 사과 한 개를 먹고, 자라난 머리카락을 다듬은 후 천천히 걷고 또 걸었다. 차이밍량은 “쫓기듯 사는 삶 속에서 느림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인테리어’에서 물에 몸을 던져 숨진 여성의 모습을 마을 사람 역을 맡은 배우가 묘사하는 장면. 빈 페스티벌 제공
‘인테리어’에서 물에 몸을 던져 숨진 여성의 모습을 마을 사람 역을 맡은 배우가 묘사하는 장면. 빈 페스티벌 제공
프랑스 출신 현대연극의 거장 클로드 레지(91)가 일본 시즈오카 극단과 만든 ‘인테리어’는 20분간 벌어진 일을 70분 동안 늘려서 보여줬다. 한 여성의 죽음을 알려야 하는 마을 사람과 여성의 가정에서 평온하게 벌어지는 일을 현실과 다른 시간의 속도로 구현한 것. 배우들은 모래가 깔린 무대에서 슬로모션을 하듯 천천히 움직였다. 서 있다 앉는 데만 수십 초가 걸렸다.

유럽 창작그룹 ‘FC 베르흐만’이 여우에 대한 서양의 전설을 다룬 ‘판 덴 보스’에서는 바다, 절벽 등 무대에서 구현하기 힘든 장소에서 벌어진 일이 중간중간 영상으로 소개됐다. 실내악단이 음악을 연주하고 배우들은 때로 노래하고 춤추며 몽환적인 무대를 선사했다. 싱가포르 연출가인 호추니엔(38)의 ‘만 마리의 호랑이들’은 아시아 호랑이에 대한 전설을 전구와 구형 라디오, 축음기가 설치된 무대에서 풀어냈다.

‘당나라의 승려’와 ‘만 마리의 호랑이들’ 공동 제작에는 광주 아시아예술극장이 참여했다. 두 작품은 내년 하반기에 문을 여는 아시아예술극장의 개관작으로 국내에도 소개될 예정이다. 김성희 아시아예술극장 예술감독(48)은 “아시아 지역에서 공동 제작을 추진하고 다양한 동시대(컨템퍼러리) 공연을 소개해 아시아예술극장을 동시대 공연예술의 중심지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빈=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빈 페스티벌#인테리어#당나라의 승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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