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여든여섯 엄니의 ‘삐뚤빼뚤 행복’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5월 3일 03시 00분


코멘트

섬진강 시인 김용택 가족이 함께 쓴 ‘보통사람 사는 이야기’
◇나는 참 늦복 터졌다/박덕성 구술·이은영/글·김용택 엮음/240쪽·1만3500원·푸른숲

박덕성 할머니(왼쪽)는 큰며느리 이은영 씨에게 글을 배웠다. 글을 쓰면서 할머니는 자신감과 성취감을 가졌고,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귀 기울이게 됐다. 이들의 아들이자 남편인 김용택 시인은 “공부는 생각과 행동을 바꾸고 나를 바꿔서 세상을 바꾸는 일임을 어머니가 보여줬다”고 했다. 왼쪽은 ‘까막눈’이었던 할머니가 처음으로 쓴 글. 오른쪽은 그가 색실로 이름을 새겨 넣은 찻잔받침. 푸른숲 제공
박덕성 할머니(왼쪽)는 큰며느리 이은영 씨에게 글을 배웠다. 글을 쓰면서 할머니는 자신감과 성취감을 가졌고,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귀 기울이게 됐다. 이들의 아들이자 남편인 김용택 시인은 “공부는 생각과 행동을 바꾸고 나를 바꿔서 세상을 바꾸는 일임을 어머니가 보여줬다”고 했다. 왼쪽은 ‘까막눈’이었던 할머니가 처음으로 쓴 글. 오른쪽은 그가 색실로 이름을 새겨 넣은 찻잔받침. 푸른숲 제공
팔순을 훌쩍 넘긴 할머니는 병상에 누운 뒤 날이 갈수록 무기력해졌다. 몸이 좀 괜찮은 날에는 침대에 우두커니 앉아 시간을 흘려보냈다. 며느리는 그런 시어머니가 한없이 안타까웠다. 부지런하기로는 시어머니 따라갈 사람이 없었는데….

어느 날 며느리는 군산에 벚꽃놀이를 갔다가 바늘과 실을 파는 가게에 눈이 번쩍했다. 바느질을 좋아하고 잘하셨던 시어머니 생각이 났다. 꽃구경 대신 퍼뜩 돌아와 시장 한복집에서 조각 천을 샀다. 시어머니 앞에 천과 실이 담긴 반짇고리가 놓였다. 며칠 뒤 병원에 갔을 때 시어머니는 조각보 다섯 개를 내왔다. 조각보, 찻잔받침, 홑이불, 베갯잇이 속속 만들어졌다. 어머니의 바늘 끝에서는 고향의 봄 산 벚꽃이 피어났고, 꽃 실이 딸려갈 때마다 산새 소리가 새어나왔다. 어머니의 손이 사부작사부작 움직이면 천 위에 작은 들꽃이 오종종 얼굴을 내밀었다.


‘바느질을 시작하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놀랍게도 어머니 눈빛이 살아났다는 것을 알았다. 병원에서 집 생각 말고, 자식들 생각 말고, 아프다는 생각 말고, 죽기를 기다리는 거 말고, 나만 기다리는 거 말고, 다른 생각과 고민을 하고 할 일이 생겨서 어머니의 모든 신경이 살아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았다.’

어머니가 바늘을 든 지 두 달쯤 지났을 때, 며느리는 또 다른 궁리를 했다. 예쁜 공책에다 어머니와 글쓰기를 해보자고. 팔십 평생 문맹으로 살아온 어머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며느리는 어머니에게 살면서 제일 좋았을 때가 언제였는지를 생각해두시라 했다.

다음에 병원에 갔을 때 어머니가 그랬다. “나는 용택이(아들) 선생 된 때가 젤로 좋았다.” 이 말을 며느리가 받아쓰고 어머니는 그 문장을 공책에 따라 그렸다. 몇 글자를 쓰는 데 30분이 넘게 걸렸다. 어머니가 문자의 세계로 들어선 것이었다.

박덕성 할머니(86)가 빨강 펜, 녹색 펜으로 삐뚤삐뚤 쓴 글에는 생의 빛나는 한 순간이 담겼다. 보통의 노인이 털어놓는 온전한 자신의 삶이다. 아무런 꾸밈없는 민낯의 이야기 사이로 지난한 세상살이를 꿰뚫는 화살이 지나간다.

‘바느질 글쓰기를 안 했다면 여름내 진(긴) 놈의 해를 어떻게 넘겼을지 모르것다. 민세 애비(아들)가 좋아하니 더 좋다. 이제 죽어도 원이 없다. 삼베 이불 만들어서 민세 애비 주고잡다. 글쓰기를 하니까 하나 생각하면 또 하나 생각나고 마음이 좋다.’

며느리 이은영 씨(52)는 어머니의 말을 새겨듣지 않았다. 똑같은 이야기를 오래도록 반복 청취했더니 앞대목만 들어도 무슨 내용이 나올지 훤히 알았다. 그런데 함께 글쓰기를 하다 보니 어머니 이야기가 새롭게 들렸다.

고부가 늘 좋게만 살아온 건 아니었다. 며느리는 불만과 원망이 많은 어머니를 만나는 게 두렵고 짜증났다. 어머니가 안쓰럽고 가여워서 시작한 바느질과 글쓰기는 거짓말처럼 이들을 변화시켰다. 어머니는 며느리가 첫 아이를 가졌을 때 뭐 먹고 싶으냐고 묻지도 않았다면서 미안해하고, 며느리는 지난 시간을 되짚으며 이해하고 눈물짓는다.

‘어머니는 몸이 아프면서 잃었던 자존감을 바느질과 글쓰기를 하면서 회복하고 계셨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어머니께 잘해야 한다는 무거운 부채감에서 벗어났다. 어머니와 글쓰기를 하면서 나는 어머니가 좋아서가 아니라, 마음이 저절로 우러나서가 아니라 꼭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눈이 무서워서, 남편이 있어서 의무감으로 책임감으로 어머니께 잘하던 때도 많았다는 걸 알았다.’

이들은 ‘섬진강 시인’ 김용택 씨(66)의 어머니와 아내다. 시어머니의 구술을 며느리가 입말을 살려 정리했다. 고부 간 대화의 주요 등장인물인 시인은 ‘에필로그’에서야 모습을 드러낸다. 적어도 지금까지 알 필요도 없고, 알면 안 되고, 알았어도 소용이 없고, 나와는 상관이 없는 어머니와 아내의 일이었으나 책을 엮으면서 그 실상을 직면했다고. 일상을 예술로 승화시키고 글을 깨치면서 어머니가 달라졌고, 아내도 시인도 모두 달라졌다. 기적은 곳곳에서 일어난다.

‘사랑은 책임과 의무가 아니다. 사랑은 마음이 가는 것이다. 내 마음이 저절로 상대에게 가 닿는 마음이다. 글쓰기를 하면서 내 마음이 어머니께 새롭게 가 닿았다. 어머니가 새롭게 내게 다가왔다.’(며느리)

“완전 시네요. 어머니 천재예요. 시 쓰는 대회 나가셔야겠어요.” “그냐? 시 같냐?” “네. 진짜 잘 쓰셨어요.” “그니까 민세 애비를 낳았지, 아무나 그런 아들을 낳을 수 있간디.” “우하하하하. 웬 잘난 체예요, 어머니.” “그나저나 내가 잘 썼냐?” “네. 솔직히 말하면 민세 아빠보다 어머니가 더 잘 써요.” “지랄한다. 자껏(잡것).”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나는 참 늦복 터졌다#김용택#이은영#박덕성#글쓰기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