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에 삼켜지는 레드의 숙명… 예술도 生의 모순에 지쳐가지요”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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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극 ‘레드’ 연출한 김태훈씨

연극 ‘레드’의 김태훈 연출은 2011년 공연 때와 동일한 배우를 기용한 데 대해 “이전의 틀을 깨는 게 어렵지만 더 깊이 들어가고 싶었다”고 말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연극 ‘레드’의 김태훈 연출은 2011년 공연 때와 동일한 배우를 기용한 데 대해 “이전의 틀을 깨는 게 어렵지만 더 깊이 들어가고 싶었다”고 말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뜨겁다. 두 남자가 쏟아내는 말의 폭포수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러시아 출신 추상표현주의의 거장 마크 로스코(1903∼1970)의 일화를 담은 2인극 ‘레드’는 관객을 거칠게 끌어당긴다. 3년 전 국내 초연됐던 이 작품은 지난해 말부터 다시 무대에 올랐다. 객석은 연일 꽉 찬다.

‘레드’는 로스코가 1958년 뉴욕 시그램 빌딩의 고급 레스토랑 ‘포시즌 레스토랑’에 걸 벽화를 의뢰받아 40여 점의 연작을 완성했다 돌연 계약을 파기한 사건을 다뤘다. 미국 작가 존 로건은 로스코가 가상의 조수 켄과 연작 작업을 하며 팽팽한 설전을 벌이는 과정을 통해 그 이유를 상상했다.

연출을 맡은 김태훈 씨(40)는 ‘레드’ 초연 당시 조연출이었다. 같은 작품을 통해 연출로 데뷔했다. 로스코 역을 맡은 배우 강신일과 켄 역의 강필석 캐스팅도 초연과 동일하다. 켄 역에는 한지상이 더블 캐스팅으로 새롭게 합류했다.

로스코는 극 중 “인생에서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단 한 가지야. 어느 날 블랙이 레드를 집어삼키는 것이지”라고 읊조린다. 레드는 그에게 생명과 젊음이다.

김 연출은 “로스코의 대사에 단단함이 묻어 나오게 하고 싶었다”며 “더 크고 견고한 성을 만들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공연에서 ‘덜어내는 데’ 초점을 맞췄다. 무대는 아기자기함을 배제하고 크고 거친 ‘덩어리’ 느낌으로 구성했다. 관객이 인물에 더 집중하게 만들기 위한 것. 공연에 나오는 로스코의 ‘시그램 벽화’ 5점은 무대제작팀이 아닌 화가 서지선 씨가 그렸다. 김 연출은 “그림을 통해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레드’가 미술뿐 아니라 인생을 제대로 다룬 연극임을 보여주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구세대와 신세대, 아버지와 아들, 삶과 죽음에 대해 다룬 작품이에요.”

로스코는 ‘포시즌 레스토랑’에 다녀온 후 깊은 회의에 빠진다. ‘백만장자들이 거들먹거리며’ 터무니없이 비싼 식사를 하는 곳에서 자신의 작품은 한낱 ‘장식품’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며 고통스러워한다. 유명 작가로 인정받은 로스코였지만 5달러 이상을 먹는 데 사용하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라고 여겼다. 로스코의 ‘오렌지, 레드, 옐로’는 2012년 8690만 달러(약 930억 원)에 낙찰돼 오늘날 가장 비싸게 팔리는 현대미술 작품의 작가가 됐다.

로스코는 “예술가는 배고파야 해. 나만 빼고”라고 말한다. 김 씨에게도 돈의 의미를 물었다. “돈이 있어야 공연도 만들 수 있죠. 예술은 자위행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26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3만5000∼5만 원. 02-580-1300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레드#김태훈#마크 로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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