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묵의 ‘한시 마중’]<7>단풍같이 붉은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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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1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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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끝자락을 잡고 조촐한 술자리를 열고 싶습니다. 아름다운 사람과 함께하는 자리라면 더욱 좋겠지요. 그런 자리에 이런 시를 한 편 읽었으면 합니다.

성로(成輅·1550∼1615)라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시인이 있었습니다. 창녕 성씨 명문의 후손이었지만 벼슬을 옳게 하지 못했고 집안도 넉넉지 못했습니다. 자갈밭 석전(石田)이라는 호 외에 패랭이를 쓰고 다녀 ‘평량자(平凉子)’라는 호를 썼으니 가난한 시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저 시 하나로 희미하게나마 세상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흰 이슬이 내리자 단풍은 다투어 붉은빛을 띱니다. 이렇게 좋은 날 술 한잔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강에서 잡아 올린 생선과 채마밭에서 뜯은 나물에 막걸리를 마십니다. 얼굴이 불콰하게 달아올랐겠지요. 곁에 있던 여인이 장난을 겁니다. 붉은 단풍잎 하나 들고 와서 노인네의 불콰한 얼굴에 대고는 웃으면서, “영감님, 얼굴빛이 이 단풍잎보다 붉네요.” 이렇게 농을 합니다. 한바탕 껄껄 웃었겠지요. 스러지면서 마지막 고운 빛을 선사하는 단풍잎에 회춘을 그리는 노인의 꿈이 어른거립니다.

스러지는 단풍이 아닌 봄날의 화사한 꽃은 젊음에 어울립니다. 17세기 문인 신정(申晸)은 이런 시를 지었습니다. “어린 딸 말 배우기 시작하자, 꽃을 꺾어 장난을 치네. 웃으며 부모에게 묻기를, 제 얼굴 꽃과 같지 않느냐고(女兒始學語 折花以爲娛 含笑問爺孃 女顔花似無).” 어린 딸은 꽃을 꺾어 꽃이 예쁜지, 제 얼굴이 예쁜지 재롱을 부립니다. 딸 가진 부모의 즐거움이 이런 데 있겠지요. 단풍잎이든 꽃잎이든 얼굴에 견주면서 말을 걸어줄 사람이 있으면 아름다운 삶입니다.

이종묵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시#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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