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공감Harmony/음식을 통한 세대간 소통]사랑이 충만한 사회 “주는 대로 잘 받아먹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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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0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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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와 할머니로부터 손자, 손녀들까지 둘러앉은 밥상은 차려준 대로 먹는 교육현장이나 마찬가지다. 3대가 어울려 한끼를 먹다보면 반찬투정은 사라지고 가족의 정은 깊어진다. 동아일보 DB
할아버지와 할머니로부터 손자, 손녀들까지 둘러앉은 밥상은 차려준 대로 먹는 교육현장이나 마찬가지다. 3대가 어울려 한끼를 먹다보면 반찬투정은 사라지고 가족의 정은 깊어진다. 동아일보 DB
대선후보들은 시장에 갈 것이다. 한국 서민을 대표하는 시장 상인들의 손을 잡으며 표를 달라 애걸할 것이다. 이때에 상인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보이면 먹을거리를 주고 먹으라 보챈다. 손에 들려주는 것을 넘어 아예 입안에 밀어넣는다. 옆에 있던 후보 보좌진이 그 음식 값을 두둑하게 치를 수도 있을 것이지만, 상인들이 돈 받자고 이를 먹이는 것은 아니다. 먹어주기만 하면 고맙다. 후보들은 자신이 싫어하는 음식이라 하여도, 또 배가 불러 터질 지경이라 하여도 이를 거부할 수 없다. 한 입이라도 그 자리에서 먹고, 남은 것은 싸가야 한다. 맛있게 잘 받아먹어야 표가 들어온다.

표를 달라 할 것이면, 후보가 상인에게 음식을 먹여도 시원찮을 판에, 그 반대의 일이 일어난다. 그럼에도 이 장면을 보면서 인상 찌푸리는 국민은 없다. 지지하는 후보가 음식을 잘 받아먹을수록 속으로 흐뭇하게 여긴다. 국민의 그 마음을 우리 할머니의 말투로 표현하면 이렇다. “아이고, 내 새끼. 주는 대로 잘도 받아먹네. 쭛쭛.”

○ 사랑이란 이름으로 주는 음식


인간이 태어나 처음 먹는 것은 어미의 젖이다. 어미의 품에 안겨 어미의 젖을 빠는 것만으로 어미는 아기가 너무나 사랑스럽다. 젖 떼고 이유식을 먹을 때도 그렇다. 잘 받아먹는 만큼 어미는 행복하다. 더 자라 스스로 숟가락질을 한다 해도 얼마 동안은 밥 위에 반찬을 올려주어 먹이는데, 넙죽넙죽 받아먹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 가슴 한쪽이 뿌듯하다.

그러다, 먹이는 대로 잘 받아먹던 ‘예쁜 우리 아기’가 어느 날부터 이를 거부하기 시작한다. 스스로 제 입에 맞는 것을 먹겠다고 떼를 쓴다.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이면 어미는 먹이 결정권을 거의 잃고 만다. 사춘기를 넘기면서 어미와 아기는 먹고 먹이는 관계를 완전히 정리한다.

청년이 되면 음식을 먹이고 먹는 관계가 부활한다. 어미와 자식 간에 이 관계가 다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짝이 생기게 되고, 이들끼리 음식을 먹이고 받아먹는 관계가 형성된다. 연인끼리 삼겹살 쌈을 싸서 입에 넣어주고 침 발라 먹던 아이스크림도 먹으라고 준다. 어미가 아무리 먹이려 하여도 머리를 쌀래쌀래 저었던 그 아이가 다 자라 그의 연인 앞에서 어미와 하던 그 행동을 한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사랑이란 별 거창한 정신적 활동이 아니다. 타인의 삶을 대가 없이 무한히 책임지려는 행위이다. 이 무한 책임의 감정은 젖먹이일 때 처음 인간의 마음에 들어온다. 어미 품에 안겨 젖을 빨 때, 웬만큼 자라서도 어미가 이것저것 챙겨 먹일 때, 그 음식을 먹으며 사랑이란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내 삶을 지탱시켜주는 어미의 젖과 음식이 사랑임을 뇌의 저 아래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다가, 청년이 되어 연인을 만나게 되면 그 유사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젖먹이 때 자신의 어미가 그렇게 했듯이 연인에게 음식을 먹이며 “네 삶을 책임져 주마” 하는 것이다.

○ 신세대 음식을 먹어 보자

사랑은 주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주는 것을 잘 받아들이는 상대가 있어야 사랑이 성립한다. 아니다. 근원적으로는 (젖을, 음식을, 나아가 마음을) 받아먹을 수 있는 상대가 없으면 사랑이라는 감정도 생성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사랑은 주는 것이라고만 생각한다. 사랑을 받는 것에는 소홀하다. 어미가 주는 대로 아무 의심 없이 넙죽넙죽 잘 받아먹던 아기 때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야 어미가 너무나 행복해한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이다.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든 구세대는 신세대의 ‘일탈’을 걱정한다. 음식에 관한 것은 더 심하다. 구세대는 자신들이 먹던 그 음식을 신세대가 더 이상 먹지 않으려 하는 것을 걱정한다. 구세대는 이를 두고 신세대의 사랑 거부로 여길 수도 있다. 이를 뒤집으면 어떨까. 구세대가 신세대의 음식을 넙죽넙죽 받아먹는 일을 해보는 것이다. 내 식성에는 맞지 않지만 그들이 맛있다 하는 것을 먹어보는 것이다. 학교 앞 불량스러운 분식집에서, 정크 푸드의 편의음식점에서, 조미료 범벅의 프랜차이즈 중국집에서 그들과 마주앉아 음식을 먹는 것이다. 그들이 “이게 맛있어, 저게 맛있어” 하며 그 요상한(?) 음식을 입안에 밀어 넣어주면, 시장의 대선후보들처럼. 정말 맛난 듯이 먹어주는 것이다. 그들의 사랑인 듯이 받아먹어 주는 것이다.

“주는 대로 먹겠다.” 우리가 아기일 때는 다 이랬다. 그래서 어미의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하였고 행복하였다. 시장의 대선후보들은 아기 흉내를 내며 국민들에게서 사랑을 훔치려 하고 있다. 그래야 표를 준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아는 것이다. 극악한 인간관계의 정치판에서도 사랑을 이용하고 있는데, 우리의 일상사에서는 왜 이게 부족한지. 받아먹기만 잘해도 사랑이 충만할 것이거늘.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 blog.naver.com/foodi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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