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지막 왕녀’ 이해경 여사 국립고궁박물관 초청 방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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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0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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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경 여사 “윤대비마마 앞에서 노래하던 때 엊그제 같은데…”

일곱 살 적 이해경 여사. 옆에 순정효황후가 선물한 ‘블란서 인형’이 있다. 이해경 여사 제공
일곱 살 적 이해경 여사. 옆에 순정효황후가 선물한 ‘블란서 인형’이 있다. 이해경 여사 제공
“대비마마께 문안을 드리면 항상 제게 ‘노래하라’고 시키셨어요. 노래를 하면 대비마마께선 손도 잡아주시고 볼도 쓰다듬어 주셨죠. 김 상궁은 이런 저를 ‘붕아붕붕 아기씨’라고 불렀어요. 이곳은 그대로인데, 세월은 80년이나 흘렀네요.”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창덕궁 낙선재는 체험학습을 하러 온 학생들로 바글거렸다. 이 건물은 본디 국상(國喪)을 당한 왕후들이 소복을 입고 은거하던 곳. 1926년 조선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1874∼1926)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정실인 순정효황후 윤씨(1894∼1966)가 별세하기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단청도 하지 않은 수수한 모습의 낙선재와 시끌벅적하게 이곳을 돌아다니는 학생들을 한참 바라보던 이해경 여사(82)는 어릴 적 윤 황후와의 추억을 털어놓았다. 고종의 아들이자 순종의 이복동생인 의친왕(1877∼1955)의 다섯째 딸인 이 여사는 윤 황후를 떠올릴 때마다 꼬박꼬박 ‘대비마마’라고 칭했다. “환하게 웃는 모습을 뵌 적이 없을 정도로 엄격하고 무서운 왕실 최고의 어른이셨지만 유독 내게만은 자상하셨다”고 그는 회고했다.

“저 학생들처럼 어릴 적 저도 낙선재 안을 뛰어다녔죠. 왕실 어른들께 많이 혼났지요(웃음). 이곳에 소극장도 있었는데, 무용수 최승희가 공연했던 기억이 나요. 저 너머에 있던 장독대에 올라가면 창경원 낙타가 보였어요. 극장과 장독대는 다 사라지고 없네요.”

미국 뉴욕에 거주하는 이 여사는 ‘조선왕조 마지막 왕녀’다. 문화재청 산하 국립고궁박물관 초청으로 지난달 27일 방한했다. 박물관은 문화재청이 운영하는 문화유산 멀티서비스 ‘헤리티지 채널’과 함께 창덕궁, 운현궁 등 이 여사의 추억이 담긴 고궁 곳곳을 돌아다니며 조선 왕실에 대한 그의 기억을 고스란히 영상으로 기록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1930년에 태어난 이 여사는 당시 서울 종로에 있던 의친왕 사저 사동궁(寺洞宮)에서 왕실 법도를 지키며 살았다. 광복 후 경기여고와 이화여대 음악교육과를 졸업했으며 1956년 몰락한 왕가의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에 미국 유학을 떠났다. 뉴욕 컬럼비아대 동아시아도서관 한국학 사서로 27년간 일했고 1997년엔 책 ‘나의 아버지 의친왕’을 출간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대한제국 훈장을 아궁이 밑에 묻으며 한참을 울었어요.”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운현궁 노안당을 방문한 이해경 여사. 흥선대원군의 사저였던 이곳은 이 여사의 오빠인 이우 왕자(1912∼1945) 가족이 살아 어릴 적 자주 왕래했다고 한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운현궁 노안당을 방문한 이해경 여사. 흥선대원군의 사저였던 이곳은 이 여사의 오빠인 이우 왕자(1912∼1945) 가족이 살아 어릴 적 자주 왕래했다고 한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이날 오전 서울 종로구 경복궁 내 국립고궁박물관을 찾은 그는 대한제국 황실이 발행한 훈장을 모아놓은 전시실에서 한동안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어머니 의친왕비 김씨(1878∼1964)가 “북한군이 우리 정체를 알면 위험하니 사진과 훈장을 다 없애라”고 했다. “훈장과 함께 집에 있던 금으로 된 용 모양 상(像)을 함께 묻었는데, 그게 무엇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사진은 차마 태우지 못해 다락에 숨겨놓았지요. 안타깝게도 궁이 철거되면서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어요.”

그는 순종 사후 태어나 ‘마지막 황제’를 직접 만난 일은 없다. 그러나 그는 “순종 황제를 직접 뵌 언니들은 ‘황제께서 무서울 정도로 위엄이 있으셨다’고 했다. 특히 족보에 있는 왕실 어른들의 얼굴과 이름을 모조리 외울 정도로 기억력이 비상하셨다고 했다”고 전했다.

이귀영 국립고궁박물관 전시홍보과장은 “조선왕실에 대해 이야기할 사람이 거의 모두 세상을 떠난 상황에서 이 여사의 증언은 조선왕실의 진정한 모습을 아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여사는 “한때는 대한민국 정부에 섭섭한 점도 있었지만 이젠 다 고마울 뿐이다”라며 “다만 왕가의 종손이 제사를 모시는 등 왕실의 전통을 잘 지킬 수 있게 지원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조선#고궁박물관#왕녀#이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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