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봄 어느 새벽 시인이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자택에서 잠을 자던 그는 또 한번의 아침을 맞지 못하고 영영 눈을 감았다. 마흔 일곱의 나이. 1998년 등단해 시집 네 권을 냈으며 2003년에는 출판사를 차려 시집과 시 계간지를 열정적으로 펴내던 출판인. 사인은 심근경색. 과로가 원인이었다. 출판사 문학의전당 대표였던 김충규 시인(1965∼2012·사진)이다.
김 시인은 부지런했다. 10년 동안 ‘문학의전당 시인선’으로 131권의 시집을 냈으며 철마다 펴낸 계간 ‘시인시각’은 26호까지 나왔다. ‘1인 출판’을 했던 그는 항상 마감에 쫓겼지만 시간을 쪼개 자기 시를 쓰는 데도 게으르지 않았다.
그가 떠난 자리. 장례식장에는 그를 아꼈던 문인들이 내내 자리를 지켰다. 몇몇은 49재까지 챙겼다. 평소 그를 ‘충규 형’이라고 불렀던 한 살 아래 고영 시인(46)은 49재에 참석하지 못했고, 미안한 마음에 고인의 부인에게 안부전화를 걸었다가 뜻밖의 말을 들었다. 문학의전당을 인수하려고 몇몇 사람이 나섰지만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르고 있으며, 모두들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계간지는 폐간하겠다고 했다는 것. 부인의 눈물 섞인 하소연을 묵묵히 듣고 있던 고 시인이 한마디했다. “형수, 그러면 나 줘요. 내가 한번 해볼게.”
2003년 등단해 10년간 전업시인으로 살아왔던 고 시인은 이렇게 문학의전당 새 대표가 됐다. 9일 서울 공덕동 문학의전당 사무실에서 만난 고 대표는 “내가 왜 이것을 떠맡게 됐는지 안 믿긴다”며 웃었다. “출판사를 경영할 욕심보다는 사실 형수와 두 자녀만 남은, 충규 형네가 걱정되어서였다”고 털어놨다. 시인은 통장 잔액을 탈탈 털어서 인수금을 냈고, 한동안은 인세를 모두 유족에게 전달했다. “충규 형은 평생 같이 가기로 했던 동지였어요. ‘우리는 죽을 때까지 서정(抒情)으로 가자’고 다짐하기도 했죠.”
사무실에는 고인의 흔적이 가득하다. 고인이 쓰던 책상과 소파, 의자, 냉장고 등 집기가 그대로 남았다. 냉장고 속에는 속이 불편했던 고인이 즐겨 마시던 까스활명수 3병, 책상 아래에는 건강식품까지 남아있다. “이거 볼 때마다 충규 형 생각이 나서, 차마 버리지 못하겠더라고요.”
5월 출판사를 인수한 고 대표는 벌써 4권의 시집을 냈고 다음 달 겨울호부터 계간지를 다시 펴낼 예정이다. 배한봉 시인이 주간을, 조동범 박후기 시인, 강경희 남승원 문학평론가 등 4명은 편집위원을 맡았다. 모두 고인과 절친했던 이들이다. 시인은 가도 잡지는 그를 기리는 사람들의 손에 의해 다시 살아난 셈이다. 제호는 ‘시인시각’에서 ‘시인동네’로 바꿨다.
“사실 시인시각은 좀 날카롭다는 이미지가 있었는데 저는 남에게 싫은 소리를 못하는 성격이거든요. 문단 별명도 ‘친절한 고영 씨’래요. 허허…. 잡지를 만들며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해야 한다’ 등의 거창한 무언가는 없어요. 네임 밸류, 출신지면을 따지지 않고 그냥 시인들이 맘껏 뛰어놀 수 있는 운동장을 만들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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