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토요일, 고뇌하는 먹물들이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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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9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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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 세계 최초 유일한 시인축구단 ‘글발’, 창단 20주년 맞아 기념 시선집 펴내

자칭 ‘세계 최초, 유일한 시인축구단’인 ‘글발’이 창단 20주년 기념 시선집 ‘토요일이면 지구를 걷어차고 싶다’()를 펴냈다. 7월 강원 정선에서 경기를 가진 글발 멤버들. 글발 제공
자칭 ‘세계 최초, 유일한 시인축구단’인 ‘글발’이 창단 20주년 기념 시선집 ‘토요일이면 지구를 걷어차고 싶다’()를 펴냈다. 7월 강원 정선에서 경기를 가진 글발 멤버들. 글발 제공
때는 1991년. 시인 김요일이 근무하는 문학세계사는 시인들의 사랑방이었다. 당시 출판저널에서 일하던 시인 김중식도 가끔 들러 바둑을 뒀는데 어느 날 축구 얘기가 나왔다. 김중식이 서울대 국문과 출신들로 구성된 축구팀에서 뛴다고 하자 김요일 시인이 ‘공 좀 찬다’는 시인들을 모아 도전장을 내민 것.

당시 문화계에서는 축구팀 3개가 유명했다. 서울대 국문과 출신 인사들로 구성된 ‘소나기’, 영화인 중심으로 모인 ‘가고파’, 그리고 시인들이 뭉친 ‘서북청년단’(서울 서북지역 시인들이 모였다는 의미로 ‘사상성’과는 관계가 없다).

“‘소진에의 추억과, 공동체 정신에 대한 긍정과 지겨움’을 갖고 있는 1980년대 초반 학번들이 자신들의 모태에 대한 회환과 기억을 비켜 가게 하는 매체로 축구는 기여했다.”(시인 배문성) 뜨거웠던 아스팔트는 푸른 그라운드로 대체됐고, 90년대를 맞은 청춘들은 땀을 흘리며 지나간 80년대에 대한 회환과 헛헛함을 달랬다.

‘가고파’와 ‘소나기’는 90년대 중후반을 넘기며 활동이 흐지부지됐지만, 시인들의 드리블은 멈추지 않았다. 1999년 서북청년단에서 ‘글발’로 팀명을 바꾸며 요즘에도 한 달에 한두 번 토요일에 모인다. 금요일 밤 각지에서 소주잔을 꺾던 시인들은 불콰해지면 연락책에게 전화를 한다. “야, 내일 공 차러 어디로 가야 해?”

‘세계 최초, 유일한 시인축구단’이라는, 팩트를 확인하기 어려운 문패를 천연덕스럽게 단 ‘글발’이 창단 20주년 기념 시선집 ‘토요일이면 지구를 걷어차고 싶다’(북인)를 펴냈다. 단원 46명이 대표시를 3편씩 골라 냈고, 전윤호 배문성 채풍묵은 글발의 과거와 현재를 그린 산문을 보탰다.

‘사랑은 축구공이다. 내 사랑이 발에게 지시한다. 달려라! 나는 미친 듯 골대로 돌진한다. 이면이란 없다. 돌려 차지도 않는다. 사랑은 돌려 차거나 둘러치지 않는다.’(김점미 ‘그리운 분노’ 중)

고뇌하는 빈자(貧者)의 아우라를 지닌 시인들이 가죽 공 하나를 두고 헐떡거리며 뛰어다니는 모습은 왠지 엇박자 그림이다. 하지만 전윤호는 말한다. “열정 없이 시인이 될 수 없으며, 평안해 보이는 듯한 (시인의) 외모 속에 불타는 투지를 숨기고 있다.”

글발 감독인 채풍묵의 포지션 설명을 읽다 보면 웃음이 난다. “중앙포워드 김요안 평론가는 드리블이 유연하다. 여성들을 대할 때처럼 기량이 매끄럽다.” “백인덕이 경기하다 말고 (그라운드 위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에서 어이없기도 하고 한편 ‘내가 시인축구단에서 경기하는구나’란 실감도 들었다.”

창단 당시 ‘시발’(시인의 발) ‘서북붉은청년단’ ‘장미촌’ 등을 두고 고심했던 팀명이 글발로 정해진 뒤 시인들은 이름에 맞게 20년 동안 부지런히 글도 쓰고 공도 찼다. “조기 축구회보다 못하지만 실력이 영 꽝은 아니다”(조현석)라는 말처럼 승률은 5할을 밑돌지만, 아무러면 어떤가. 금요일 밤 술자리에서 시인들은 내일의 결전 일정을 뒤늦게 통보받을 것이며, 이튿날 오후에는 어김없이 술이 덜 깬 상태로 ‘결연히’ 그라운드에 하나둘 나타날 것이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글발#시인축구단#시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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