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꽃과의 대화]은행나무 같은 암수딴그루… 화려함 모르고 살아온 네 모습 짠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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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8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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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철 부부

소철의 암나무(왼쪽)와 수나무.
소철의 암나무(왼쪽)와 수나무.
지난주 제주도에서 국제회의가 있어 다녀왔다. 개인적으로는 예전에 잠시 공부했던 아열대 식물의 식생을 다시 복습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마침 꽃식물을 전공하는 전 세계 전문가들의 회의인지라 제주의 식물에 대한 외국 사람들의 질문이 많았다. 이런 질문은 나의 ‘복습 의지’를 자극해 줬다. 협죽도, 까마귀쪽나무, 천선과나무, 소철, 송악 등 제주도에서는 아주 일반적인 식물들이 그들 눈에는 신기하게 보이는 듯했다.

■ 암나무와 수나무가 따로 있는 소철

회의 중간 쉬는 시간에 한 외국인이 정원의 소철을 가리키며 무엇이냐고 물었다. “Cycas revoluta”라고 하자 자기네 나라에서도 실내 원예에 많이 이용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학명은 이래서 참 편하다. 해외 어느 나라의 전문가와도 쉽게 소통할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소철 사진을 찍다가 질문을 던졌다. “소철 잎이 모여 있는 곳 가운데에 삐쭉 솟아나온 저것은 뭔가요?” 나는 무심히 “꽃”이라고 대답했다. 앗, 그런데 옆의 포기에는 둥근 공 같은, 뭉치 모양의 무언가가 있지 않은가. 아…, 아까 것은 수꽃이고 이것은 암꽃이구나! 암수딴그루인 소철 한 쌍이 우연찮게도 한곳에 심어져 있었던 것이었다. 참 재미있는 풍경이다 싶어 찍은 것이 옆의 사진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무궁화나 장미 같은 식물은 나무 한 그루에서 수술과 암술을 함께 갖춘 꽃을 피운다. 일부 식물의 경우 한 그루에서 암꽃과 수꽃이 따로 핀다. 이런 식물을 암수한그루딴꽃(자웅동주이화·雌雄同株異花) 식물이라고 한다. 소나무, 자작나무, 베고니아, 오이, 옥수수, 으름덩굴이 대표적이다. 한편 소철과 같은 암수딴그루(자웅이주·雌雄異株) 식물은 암수가 서로 다른 그루로 존재한다. 은행나무, 주목, 능수버들, 먼나무, 호랑가시나무 등 의외로 많은 식물이 그렇다.

○ 동물과 반대로 진화한 식물의 성(性)


자, 여기서 한 가지. 암수딴그루 식물에 뭔가 뚜렷한 공통점이 있는 것 같지는 않은가. 그렇다. 암수딴그루 식물은 풀이 아닌 나무에 속하고, 예쁘고 화사한 꽃을 피우지 않는다. 물론 예외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식물의 진화는 나무에서 풀로, 암수딴그루에서 암수같은그루로, 그리고 암수 딴꽃에서 우리가 흔히 보는 암술과 수술이 함께 있는 꽃으로 진행됐다. 식물의 성(性) 관련 진화는 어찌 보면 고등동물의 그것과는 반대 방향으로 흘러간 것이다.

대부분의 생물에 있어 성의 분화는 성공적인 종족 보존을 위해 최대한 다양한 유전자 조성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이런 점에서 고등식물의 암수 양성이 한 꽃에 갇히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고등식물들은 동물과는 다른 형태로 최대한 다양한 유전조성을 가진 개체를 만들고자 노력하게 됐다. 그 대표적인 예로 꽃가루가 암술보다 먼저 성숙되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암술이 같은 꽃의 꽃가루를 받을 가능성이 낮아진다. 암술이 같은 꽃의 꽃가루를 받았다 하더라도 수정이 이뤄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런 자가불화합성(自家不和合性)을 가진 식물은 결국 곤충이 가져온 다른 개체의 꽃가루를 받아서 유전적 다양성을 얻는다. 즉, 같은 꽃에 있는 암술과 수술이 사실은 다른 개체와의 만남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감탄해 마지않는 화려한 꽃은 종족 보존과 종내 유전적 다양성을 위한 식물의 피나는 노력의 결과다. 그렇다고 복잡한 메커니즘 없이도 종을 보존해 온 은행나무나 소철을 게으르다고 탓할 수는 없다. 인생도 그러하듯 식물계도 다양성을 통해 균형을 이루기 때문이다.

제주의 금실 좋은 소철 ‘부부’를 보면서 떠오른 단상이 조금 길어졌다. 어쨌든 무더운 여름밤을 보내며 멀어졌던 부부들도 소철의 사진을 보며 서로에게 조금은 더 살가워질 수 있다면 좋을 듯싶다.

서정남 농학박사(농림수산식품부 국립종자원) suhjn@korea.kr
#소철#암수딴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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