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시의 산실 ‘실천시선’ 28년만에 200호 기념 시집 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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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8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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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제단에 바쳐진 200송이 꽃다발

실천문학사의 ‘실천시선’ 200호 기념 시집 ‘나는 상처를 사랑했네’와 1984년 ‘시여 무기여’를 필두로 지금까지 발간된 시집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실천문학사의 ‘실천시선’ 200호 기념 시집 ‘나는 상처를 사랑했네’와 1984년 ‘시여 무기여’를 필두로 지금까지 발간된 시집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시가 무기인 적이 있었다. 서슬 퍼렇던 군사정권에 대한 분노와 저항은 울분의 시어들로 태어났고, 때론 노래로 변해 달궈진 아스팔트 위에 울려 퍼졌다.

실천문학사의 ‘실천시선’이 28년 만에 200호 기념 시집 ‘나는 상처를 사랑했네’를 펴냈다. 1984년 ‘시여 무기여’를 시작으로 30년 가까이 쌓은 굳건한 탑이다. 이번 기념 시집은 개별 시집들의 대표시 1편씩을 엄선해 총 128편을 한 권에 담았다. 장시집을 제외했고, 두 권 이상 낸 시인들도 한 편만을 골라 200편에 모자라게 됐다. 시집을 펼치면 시인의 눈으로 기록한 질곡의 한국 현대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듯하다.

실천시선은 초기 주로 시선집 형태로 나왔다. 1980년대 당시 상황을 반영하듯 옥중시 저항시 노동시 농민시가 주제별로 나왔다. 시를 통해 세상을 바꿔보자는 문학운동의 일환이기도 했다.

‘오월 어느 날이었다/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밤 12시 나는 보았다/경찰이 전투경찰로 교체되는 것을/밤 12시 나는 보았다/전투경찰이 군인으로 교체되는 것을’(김남주의 ‘학살 1’ 일부)

실천시선의 특징은 ‘참여시’였지만 그 틀만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강은교의 ‘우리가 물이 되어’, 조용미의 ‘벽오동나무 꽃그늘 아래’ 등 맑고 깊은 서정시들도 선보여 외연을 넓혔다.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아아, 아직 처녀인/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강은교의 시 ‘우리가 물이 되어’ 일부)

실천시선은 한국 시사에 획을 긋는 시집들뿐만 아니라 대중적으로 널리 사랑을 받은 베스트셀러도 여럿 배출했다. 양성우의 ‘靑山이 소리쳐 부르거든’ 김남주의 ‘나의 칼 나의 피’ 김지하의 ‘애린 1, 2’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노래’ 허수경의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등이다.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은 시선의 첫 밀리언셀러가 됐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신경림의 시 ‘가난한 사랑노래’ 일부)

시대는 바뀌었지만 시인들의 눈은 여전히 날카롭다. 노동 환경 여성 빈부격차 등 시로 ‘실천’해야 할 문제들은 지금도 널려있기 때문이다. 염무웅 문학평론가는 200호를 맞아 이런 추천글을 썼다. “200계단 금자탑이 아니라 역사의 제단에 바쳐진 200송이 꽃다발이다. 다시 28년이 흐른 2040년에도, 그보다 열 배 스무 배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실천’의 광채가 빛나기를 바란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출판#시#참여시#실천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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