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전 노동소설가, 텃밭의 흙내음 인터넷에 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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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5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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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진씨, 창비 블로그에 ‘세상살이’ 연재

16일 경기 고양시 장항동 텃밭에서 작물을 돌보는 ‘1980년대 노동문학의 대표작가’ 정화진(왼쪽 사진). 1990년대 초반 홀연
 문학판을 떠났던 그가 ‘도시 농부’로 돌아와 20년 만에 작품활동을 재개했다. 1980년대 노동문학을 함께했던 다섯 살 아래 
후배 김한수(오른쪽 사진 왼쪽)는 이제 그의 20년 지기가 됐다. 고양=황인찬 기자 hic@donga.com
16일 경기 고양시 장항동 텃밭에서 작물을 돌보는 ‘1980년대 노동문학의 대표작가’ 정화진(왼쪽 사진). 1990년대 초반 홀연 문학판을 떠났던 그가 ‘도시 농부’로 돌아와 20년 만에 작품활동을 재개했다. 1980년대 노동문학을 함께했던 다섯 살 아래 후배 김한수(오른쪽 사진 왼쪽)는 이제 그의 20년 지기가 됐다. 고양=황인찬 기자 hic@donga.com
대학(서강대 영문과 80학번)을 졸업한 청년은 인천의 주물공장에 선반공으로 위장 취업했다. 이를 바탕으로 1987년 가을 스물일곱의 나이에 단편 ‘쇳물처럼’을 발표한 그는 단편 ‘우리의 사랑은 들꽃처럼’, 장편 ‘철강지대’ 등을 발표하며 ‘새벽 출정’의 방현석, ‘성장’의 김한수 등과 함께 1980년대 노동문학의 성취로 불렸다.

1992년 가을. 그는 홀연 문단을 떠났다. 뜨거웠던 1980년대에 뛰어들어 용광로와 같은 소설을 썼다가 차갑게 굳어간 이름, 소설가 정화진(본명 황의돈·52)이다.

그가 20년 만에 펜을 잡았다. 지난달부터 출판사 창비의 인터넷 블로그에 산문 ‘도시농부 정화진의 세상살이’를 주간 연재하고 있다. 작물을 심고 돌보는 담담한 일상이 담백한 문체로 이어진다.

16일 오후 경기 고양시 마두역 앞에서 만난 작가는 허름한 작업복에 흙 묻은 등산화를 신고 있었다. 그가 일구는 텃밭으로 자리를 옮겼다. 130m²(약 40평) 남짓한 밭에 마늘과 양파, 상추가 푸릇하게 올라와 있다. 3년 전 인천에서 고양시 풍동의 아파트로 이사한 그는 지난해부터 농사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일종의 귀농 준비죠. 작게 농사도 짓고, 글도 쓰고, 불러주면 강연도 하고. 언젠가는 시골서 그렇게 살고 싶어요.”

그는 호미를 들고 마늘 밭의 김을 맸다. 이내 주위가 어둑해졌다. 옷의 흙을 툭툭 털고 그가 말했다. “막걸리나 한잔합시다.” 마두역 근처 막걸리집에 마주 앉았다. 20년 전 그렇게 떠난 이유가 궁금했다.

“80년대를 꿰뚫는 서사가 있는 작품을 쓰고 싶었지요. 우리 시대 자화상을 써보려 했는데 30대 초반이었던 나는 너무나 세상을 아는 게 없는 거야. 주변에는 노동자만 있었는데 세상은 노동자만 사는 게 아니니까. 그때 노동자만 뜨거웠나? 대기업 다니는 사람, 선생님, 뜨겁지 않은 인간이 어디 있어. 그걸 아우르고 싶었는데 어림 반 푼어치도 없었지.”

선인세(350만 원)를 받고도 몇 달 동안 끙끙대던 그는 결국 ‘문학적 한계’를 절감했다. ‘글도 못 쓰는 놈이 가장 노릇도 못 한다’는 자괴감에 생활전선으로 뛰어들었다. 서울 강남의 무역회사 영업사원도 하고, 후배 작가 김한수와 액세서리 장사에도 나섰다. 6년간 입시학원 영어강사도 했다. 다시 펜을 잡은 이유는 뭘까.

재작년 허리와 다리가 아파 병원에 갔는데 척추에 종양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암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 절박한 상황에서 생각난 것은 ‘소설’이었다.

“암 판정 나면 마누라에게 ‘산속에 들어가고 싶다. 딱 (소설) 한 편만 쓰고 가게’라고 말하려고 했지. 그때 깨달았어. ‘내가 글쟁이구나, 소설에 목맨 사람이었구나’라는 것을….”

다행히 ‘물혹’ 판정을 받았다. 병석에서 일어선 그는 산문부터 시작했다. “청년 때는 잡문이라고 생각해 거들떠보지도 않았지. 지금은 일주일에 200자 원고지 20장 채우는 것에도 쩔쩔매.” 허허 웃는 그의 얼굴이 밝았다.

최근 논란을 빚고 있는 통합진보당 사태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내가 그쪽(운동권)을 떠난 지 오래돼서 내부 사정은 몰라. 하지만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발’ 소리가 먼저 나와. 지지해준 국민을 매우 실망하게 만드는, 책임 없는 짓을 하고 있는 거지.” 나머지 말은 아꼈다.

2차로 옮긴 막걸리집에 김한수가 합류했다. 4년 전 고양시에 먼저 정착해 농사를 짓는 그가 정화진의 정착을 도왔다. 김한수는 출판사와 소설 계약을 했지만 ‘농사일이 바빠서’라며 집필을 미루고 있다고 했다. 취기 가득했던 그날 술자리에서 정화진이 던진 말이 잊혀지지 않았다.

“글을 다시 쓰니까 좋은데, 나이 먹은 것 같아 슬퍼. 무역회사 다닐 때 해외출장을 가면 젊은 친구들이 색색의 배낭을 메고 여행하고 있더라고. 그 자유스러움이 부러웠지. 언젠가 나도 한수랑 함께 배낭을 메고 세계 이곳저곳을 다니고 싶어. 글로도 남기고 싶고….”

고양=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정화진#창비#세상살이#노동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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