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커버스토리]이순신 장군과 닮은 영국 넬슨 제독의 자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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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4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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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명예로운 죽음 찬미… “함대 선두서 필요 이상의 모험적 전술 감행”

넬슨의 사망 소식이 알려진 뒤 당시 영국 국왕 조지 3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대승을 거뒀지만 얻은 것보다 잃은 게 훨씬 크다.” 넬슨은 200여 년 전 전장에서 명예롭게 숨졌지만 영국 국민의 가슴속에 여전히 살아있다. 동아일보DB
넬슨의 사망 소식이 알려진 뒤 당시 영국 국왕 조지 3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대승을 거뒀지만 얻은 것보다 잃은 게 훨씬 크다.” 넬슨은 200여 년 전 전장에서 명예롭게 숨졌지만 영국 국민의 가슴속에 여전히 살아있다. 동아일보DB
눈 깜빡할 순간이었다. 왼쪽 어깨가 뜨끔했다. 지름 1.75cm의 납덩이가 어깨를 강타했다. 그 납덩이는 어깨뼈를 부수고 들어가 폐에 구멍을 뚫은 뒤 동맥 하나를 끊고 척추를 지나 반대쪽 어깨 근육에 박혔다. 심장이 뛸 때마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처음 바늘로 콕 찌르는 듯한 미미한 아픔은 몇 초 지나지 않아 엄청난 고통으로 변했다. 숨쉬기도 벅찰 만큼 힘겨운 고통. 그의 얼굴은 의식을 잃지 않은 게 신기할 만큼 창백해졌다.

그런데 표정은 믿을 수 없이 평온했다. 눈빛은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잠시 뒤 그는 입을 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차분한 목소리로. “저들이 결국 나를 잡는 데 성공했군. 총알이 내 척추를 뚫고 지나갔어.”

○ “내 의무를 다하게 해준 신께 감사드린다”


그는 갑판에서 의무실로 옮겨졌다.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신음 소리로 가득 찬 그곳에서도 관심사는 오직 전장이었다. 승조원들이 함성을 지를 때마다 기뻐 함께 소리 질렀다. 총상을 입은 지 3시간쯤 흘렀을까. 승전을 눈앞에 두고 그의 부하가 울먹이며 말했다. “이제 콜링우드 제독에게 전투를 지휘하라고 하시죠.” 그는 완곡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거절했다. “아니,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내가 지휘하겠네.”

숨을 헐떡이던 그는 얼마 뒤 눈을 감으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이제 나는 여한이 없다. 내 의무를 다하게 해준 신께 감사드린다.”

1805년 10월 21일. 스페인 서남 해안 트라팔가르에서 영국 지중해 함대 사령관이었던 허레이쇼 넬슨은 47세의 나이에 이렇게 최후를 맞이했다.

영국 런던의 중심부에는 넬슨 동상이 우뚝 솟아 있다. 영국에서 넬슨은 단순한 전쟁 영웅이 아니다. 전장에서 한 눈과 한 팔을 잃고, 결국 최후의 일전에서 목숨까지 조국에 바친 깡마른 체구의 이 해군사령관은 나라를 구한 ‘전쟁의 신’으로 추앙받는다.

넬슨은 여러모로 이순신과 닮았다. 두 사람 모두 선견지명을 지닌 천재적인 전략가였고, 용기와 헌신, 그리고 카리스마까지 지닌 불세출의 리더였다.

특히 이들의 최후는 절묘하게 오버랩되며 역사적으로 조명을 받았다. 둘 다 전쟁을 거의 종결짓는 중요한 일전의 한복판에서 영웅적인 삶을 마감했다. 희생정신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한마디를 후대에 남기기도 했다. 넬슨은 죽기 직전 “내 의무를 다하게 해준 신께 감사드린다”고 했고, 이순신은 “적에게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더 흥미로운 건 넬슨의 죽음을 두고도 이순신과 마찬가지로 자살설이 나온다는 사실이다. 넬슨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판단하는 이유는 뭘까.

우선 넬슨이 트라팔가르 해전 직전 동료에게 했던 말이 증거로 인용된다. 그는 전쟁 당일 치열한 교전을 눈앞에 두고 동료에게 이렇게 말했다. “신의 가호기 있기를 비네. 나는 다시는 자네와 이야기하지 못할 걸세.” 최후를 예견한 듯한 이 말에 동료는 불길한 기분을 느꼈다.

넬슨이 필요 이상으로 모험을 감행한 것도 죽음을 염두에 두고 일부러 사지(死地)에 뛰어든 게 아니냐는 주장의 근거. 보통 당시 기함(함대나 전대에서 사령관이 타고 있는 배)은 함대 가운데 위치하는 게 상식이었다. 하지만 넬슨은 자신이 탄 기함을 언제나 선두에 나서게 했다. 또 위험 상황에서도 쉽게 눈에 띄는 자리를 고수하며 적의 표적이 됐다. 실제 몇몇 사료는 넬슨이 이전 다른 전장에서보다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좀 더 공격적이고 모험적인 전술을 택했다고 전한다.

트라팔가르 해전이 끝난 뒤 당시 전장에 있었던 다른 지휘관들의 대화 내용 역시 자살설에 신빙성을 더한다. 그들의 대화를 분석해 보면 넬슨은 죽음에 처할 만큼 위기에 노출되지 않을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넬슨은 이를 거부했고,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는 얘기다.

○ 넬슨은 명예로운 죽음을 택했을까


넬슨이 전장에서 죽음을 택할 이유가 있었을까. 영국의 한 역사학자는 “넬슨이 죽음으로 자신의 명예를 지키길 원했다”고 주장했다. 넬슨은 명예로운 죽음이 지니는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 한번은 전장에서 사망한 장군이 국민들로부터 영웅 대접을 받는 사실에 대해 벅찬 감동을 느낀다고 친구에게 얘기한 적도 있다.

당시 그가 처한 상황이 명예로운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주장도 있다. 넬슨은 이미 유명인사였지만 속으론 그의 영웅적 이미지가 손상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졌다. 특히 불륜 관계였던 에마 해밀턴(1765∼1815)과의 소문이 사람들에게 퍼진 뒤 그의 사생활이 손가락질 당하면서 그런 두려움은 더 커졌다.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도 넬슨에게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다. 그는 병사들에겐 따뜻한 지휘관이었지만 상관에겐 그다지 순종적이지 못한 성격이었다. 자연스럽게 정치적으로 그를 시기하는 세력도 생겼다. 이런 상황 속에서 넬슨은 정치판에 얽혀 때를 묻히기보단 역사에 길이 남을 전장에서 영광스러운 죽음을 택했을지 모른다.

한편으론 이런 주장도 있다. 넬슨이 해밀턴 부인에게 많은 연금을 지급하기 위해 죽음을 택했다는 것. 실제로 넬슨은 총상을 입은 뒤 그를 둘러싼 병사들에게 해밀턴과 관련한 얘기를 많이 했다. 죽음의 대가로 그녀에게 정식 아내의 자격을 부여해달라는 유언도 남겼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자격이 부여되진 않았지만, 일부 학자는 이에 근거해 넬슨이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자신의 죽음을 계획했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모두 설(說)에 불과하다. 대다수 학자는 넬슨의 자살설을 일축한다. 넬슨이 함대를 선두에서 이끌며 전투를 했다는 사실은 언제나 솔선수범하며 전장을 이끌어 온 넬슨의 모습에 비추어 볼 때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넬슨은 이미 일부 사생활 논란을 잠재우고도 남을 만큼 국민적인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었다. 따라서 죽음이란 극단적인 카드를 집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는 주장이다. 트라팔가르 해전 이틀 전 넬슨은 해밀턴에게 편지를 썼다. “전투가 끝난 다음 편지의 마지막 부분을 쓸 수 있기를 신에게 기도한다”고. 이렇듯 여러 가지 다양한 정황을 고려해도 넬슨이 스스로 목숨을 내던졌을 가능성은 낮다는 게 자살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영웅의 죽음과 관련해선 언제나 뒷얘기가 무성하다. 시대 상황, 사료를 보는 시각 등에 따라 죽음을 해석하는 방법도 달라진다. 특히 넬슨이나 이순신은 누구보다 극적인 장소에서 극적으로 최후를 맞이했다. 그래서 이들의 죽음을 두고 자살이냐 아니냐 등 논란이 분분한 것일지도 모른다.

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
#넬슨 제독#자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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