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는 뻔했지만… 온 몸으로 무대 지켜낸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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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4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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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아버지’ ★★★

장재민 역을 연기한 이순재 씨(위)는 푸근하고 친근한 이미지 때문에 극중 가부장적이고 완고한 아버지상이 선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전무송 씨(아래)는 외판원 장재민을 통해 평생성공을 향해 쉼없이 달렸으나 자신이 꿈꾸던 이상향과는 점점 더 멀어져버린 소시민 아버지의 모습을 실감나게 보여줬다. 아리인터웍스 제공
장재민 역을 연기한 이순재 씨(위)는 푸근하고 친근한 이미지 때문에 극중 가부장적이고 완고한 아버지상이 선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전무송 씨(아래)는 외판원 장재민을 통해 평생성공을 향해 쉼없이 달렸으나 자신이 꿈꾸던 이상향과는 점점 더 멀어져버린 소시민 아버지의 모습을 실감나게 보여줬다. 아리인터웍스 제공
“형님, 어떡하면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개나리, 진달래, 철쭉꽃 향기가 넘쳐나고 아이들과 집사람의 웃음소리 집안에 가득하던, 그때 그 시절은 다시 안 오겠죠?”

전성기를 지나고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추락만을 거듭하는 외판원 장재민은 이미 세상을 뜬 형님을 상상 속에서 불러내 절규한다.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사태 전후로 극예술 무대에는 사회에서 퇴물로 취급받고 자존심만 내세워 가족들에게도 소외되는 가부장적 아버지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을 2012년 한국적 상황으로 번안한 연극 ‘아버지’는 이 사면초가에 몰린 아버지상을 다시 무대로 불러 올렸다. 아버지 코드의 복고다.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지낸 김명곤 동양대 석좌교수가 번안과 연출을 맡았고 한국 아버지상의 대표적인 배우인 이순재(77), 전무송 씨(71)가 아버지 장재민을 번갈아 연기한다.

이 연극이 그리는 아버지상은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한가. 김명곤 교수는 “요즘도 직장을 잃은 아버지들의 비극이 넘쳐나고, 100만 명이 넘는 청년실업이 우리 사회의 어둡고 음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여전히 그렇다”고 말했다.

그러나 연극은 배경만 현재로 바꾸고 무대에 현대적인 색깔을 입혔을 뿐 캐릭터들은 구태의연하고 대사들은 진부하다. 무대 중앙의 집 공간 양 옆과 천장 쪽으로 배치한 울타리 같은 구조물은 현대인의 삶이 감옥 같다는 메시지를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옛날 한국 영화에서 나올 것 같은 작위적인 대사들도 극에 대한 몰입을 방해했다. 장재민과 부인(차유경)이 나누는 한 대화. “여보, 당신은 말솜씨도 좋고 멋진 사람이에요.” “사람들은 그렇게 안 보는 거 같아.” “제겐 당신이 최고예요. 애들도 당신을 최고로 떠받들지 않수? 자식들이 저희 아빠를 하늘같이 안다는 게 쉬운 일이 아녜요.” “당신도 정말 최고야. 이 세상에 의지할 사람이 당신 말고 누가 또 있겠어? 출장 가 있을 때면 당신을 안고 싶은 생각에 미치겠어.”

전도유망한 축구 선수였던 장남 동욱(이원재)이 사회 부적응자로 추락하는 것을 권위주의적 아버지의 책임으로만 몰고 가는 것도 탈권위주의의 홍역을 함께 겪었던 당시 한국적 상황과 동떨어진 느낌을 줬다.

현실감 떨어지는 이런 대본의 약점을 덮어준 것은 이순재, 전무송 두 백전노장 배우의 존재감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연기 색깔은 많이 달랐다. 이 씨의 경우 시트콤 하이킥 시리즈의 ‘야동 순재’ 캐릭터가 강하게 남아 있는 점이 친근감을 줬지만 관람의 방해 요소로도 작용했다. 시트콤에서의 가벼운 이미지가 연극 속 몰락한 중산층 아버지의 이미지와 충돌했다. 극 중에서도 관객은 이 씨의 가벼운 연기와 약간의 실수에도 즉각적으로 웃음 섞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이 씨는 22일 공연도중 세트에 부딪혀 오른쪽 눈 위가 찢어지는 부상으로 피가 흐르는데도 끝까지 공연을 마치고 치료를 받는 투혼을 보였다.

전 씨의 경우 대사의 진부함을 완전히 커버할 만큼 연기가 뛰어났다. 그가 이마의 주름살이 선명할 정도로 얼굴을 잔뜩 찌푸릴 때 지칠 때로 지쳤지만 자존심 하나로 버티어 온 우리 시대 아버지상이 상징적으로 구현됐다. 그의 사실적인 연기에는 다른 배우들의 열연까지 이끌어내는 힘이 있었다.

:: i :: 29일까지 2만5000∼4만5000원. 02-515-0405

김성규 기자 kimsk@donga.com
#공연리뷰#연극#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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