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시장, 시장 사람들]고단하지만 진솔한 자갈치 사람들… 이것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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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3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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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최민식이 55년간 앵글에 담은 자갈치시장

#1 부산 1979(위), #2 부산 1989(하단 왼쪽), #3 부산 2004(하단 오른쪽)
#1 부산 1979(위), #2 부산 1989(하단 왼쪽), #3 부산 2004(하단 오른쪽)
#1. 1979

이들에게 허락된 건 고작 10m²(약 3평) 남짓이었나 보다. 빙 둘러 생선 좌판을 깔고 나니 사람이 앉을 공간은 더 좁아졌다. 7명이 한 번에 앉기가 버거웠는지 누구는 서 있고, 누구는 앉았다. 그들의 작은 ‘성채’는 힘겨운 삶을 지켜주는 마지막 보루다.

#2. 1989

두 사람이 드잡이를 한다. 무슨 속상한 일이 있었던 걸까. 손님과 장사꾼일 수도 있겠고, 평소에 언니동생 하며 친자매처럼 지내던 이웃일 수도 있을 게다. 분명 누군가가 상대의 맘을 상하게 하는 말을 내뱉었겠지. 얼마나 화가 났는지 나이가 많은 쪽은 왼손에 장갑을 낀 채로 상대 목덜미를 잡았다. 그래도 다음 날쯤엔 화해를 했겠지?

#3. 2004

오늘도 깜빡 끼니를 거를 뻔했다 아이가. 국시 한 사발이라도 무야 힘이 나제. 생선 이거 우스버 보이제? 내가 이래 비도 이거 몇 마리쓱 팔아가 아들 서이 다 대학 보냈데이. 인자 고생한다꼬 자슥들은 좌판 때리치삐라 카지. 그래도 난 여그가 좋아. 이래 나와가 쪼매라도 벌어야 손주들 용돈이라도 주지. 내는 여서 이래 묵는 국시가 세상에서 젤로 좋드라. 》
사진 속 주인공이 누구인지, 그들이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그 대신 사진을 통해 한껏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는 있다. 그들이 입은 옷, 그들이 파는 생선, 무엇보다 그들이 짓는 표정에서 우리는 그들의 생각을 유추하고 그들의 삶을 떠올린다.

‘그래, 저 당시 저 생선장수는 저런 이유 때문에 저런 표정을 지었을 거야.’

사진이라는 기록물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 왜 시장인가

사진 속 인물 모두가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진 않다. 상당수는 이미 세상을 등졌고, 또 상당수는 어디론가 다른 삶을 찾아갔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이 그 빈자리를 꾸역꾸역 메웠다. 부산 자갈치시장에는 수많은 시장사람이 그렇게 떠나기도 했고 찾아오기도 했다.

그런데 55년간 이 시장바닥을 지켜온 이방인이 있다. 자갈치시장의 가장 오래된 ‘목격자’인 사진작가 최민식 씨(84)다. 그는 시장의 짙은 생선비린내와 사람들의 고단한 표정을 사각 앵글에 담아왔다. 자갈치시장에서 그보다 오래된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다.

최 씨는 요즘도 일주일에 두세 번 자갈치시장에 간다. 집이 있는 남구 대연1동에서 중구 남포동까지는 택시를 타도 20∼30분은 족히 걸린다. 그런데 그는 팔순의 나이에도 꼬박 3시간을 걸어서 간다. 그 유명한 산복도로를 따라 천천히 가다 보면 매일 가던 길에서도 꼭 못 봤던 장면과 마주친다. 수십 년을 다녀도 아직 새로운 장면이 있다니 스스로도 놀랄 따름이다. 시장도 그래서 간다고 한다. 오늘은 또 어떤 장면을 만날지, 50년이 넘도록 시장은 변치 않는 설렘을 준다고 그는 말한다.

어쩌면 그에게 시장은 ‘노다지 광산’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1957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어온 그는 ‘인간’에 천착해 왔다. 그의 렌즈는 항상 사람들을 향했다. 그런데 시장만큼 사람의 표정이 다양한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곳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저녁 찬거리를 사러온 주부들도 저마다 사정이 다 다를 터. 그런 사정은 표정에 그대로 묻어나기 마련이다. 시장에서는 매 순간 수천, 수만 가지의 표정이 생겨났다 사라진다. 그는 시장 한쪽에 서서 그 표정을 그저 ‘발견’하면 되는 것이다.

‘내가 자갈치시장이라는 현장 속에서 찾으려 한 것은 서민상이었다. 인물사진에 남다른 열정을 가진 나에게는 자갈치시장이야말로 서민이 몸담고 있는 사회적 공간이었다.’-‘진실을 담는 시선’(최민식·예문·2009년)

부전역 인근 부전시장도 그의 주요 활동무대 중 하나다. 이곳은 울산이나 경주 등지에서 채소나 곡식을 팔러 오는 아주머니가 많아 그가 자주 들른다. 가끔은 울산에 갔다가 이튿날 새벽에 상인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오면서 셔터를 누르기도 한다.

최 씨가 말한다.

“시장은 수시로 나가도 참 변화가 많아요. 어제와 오늘 시장에 나온 사람들이 다르고, 같은 사람들이라도 표정이 또 다르죠.”

○ 오늘도 시장에 간다

1980년대 중후반이었으니 한 25년 전쯤 일이다. 자갈치시장 구석에서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갑자기 경찰이 나타났다. 알고 보니 생선을 팔던 두 아주머니가 간첩신고를 한 것이었다. 한 명은 몰래 미행을 했고, 그 사이 다른 한 명이 파출소에 경찰을 부르러 가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사실 간첩신고를 당해 조사를 받은 게 100번은 충분히 될 터였다. 1960, 70년대에 가장 많았고 1999년 대전의 한 시장에서 사진을 찍다가 경찰서로 끌려간 게 마지막이었다. 허름한 행색에 무엇인가를 열심히 찍고 있으니 의심을 살 만도 했다. 자갈치시장의 신고자들이 특별히 생각나는 것은 아직도 그들을 가끔 시장에서 마주치기 때문이다. 최 씨가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면 아주머니들은 “아이고, 저 아제 안즉도 사진 찍고 댕기네”라며 반가워한다.

최 씨는 사진의 ‘모델’이 되는 시장사람들과 애써 대화를 시도하진 않는다. 그 사람과의 개인적인 친분이 생기는 순간 사진에 ‘의도’가 개입되기 마련이고, 이것이 곧 ‘현실성(reality)’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그렇지만 수십 년을 출퇴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유명인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안면은 있지만 말도 나눠본 적 없는 그에게 덜컥 영정 사진을 부탁한 이가 스무 명이 넘었다. 그중 몇몇이 세상을 떠났을 때 유족들은 당연히 최 씨의 사진을 장례식장에 걸었다.

최 씨는 1, 2년 전부터 디지털카메라를 사용하고 있다. 디지털카메라의 기능이 너무 좋아져 필름카메라에 집착할 이유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50년 넘도록 지켜온 흑백사진에 대한 고집도 버렸다. 디지털카메라 1대는 여전히 흑백 전용으로 쓰지만, 나머지 1대로는 컬러 사진을 찍는다. 이렇듯 흐르는 세월은 노(老) 사진가의 고집마저 꺾어놓았다. 그런데 사실 그가 아쉬워하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1960, 70년대에는 좋은 표정이 많았어요. 그때 찍은 사진들을 보면 가슴에 참 와 닿죠. 그런데 정작 제가 먹고사는 일이 바빠 생각만큼 많이 찍지를 못했어요. 지금은 시간은 많은데 그런 표정들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하물며 생선도 그때와는 분위기가 달라요. 왜 그때 더 많이 찍지 못했나 참 후회스럽죠.”

하지만 그는 오늘도 자갈치시장에 나갈 것이다. 표정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포기할 그였으면 55년간 사진을 찍는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불가능했을 거다. 오늘 그의 카메라에 담길 시장의 모습은 10년 뒤, 그리고 100년 뒤 어떻게 읽힐까.

‘나는 계속 걸었고, 언제나 카메라와 함께 있었다. 그 길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카메라로 사람들을 찍었다. 사람들은 가난했고, 나는 그들을 찍었다. 나는 없는 길을 간 것도 아니고, 이 땅에 없는 사람들을 찍은 것도 아니다.’-‘낮은 데로 임한 사진’(최민식·눈빛·2009년)

부산=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 최민식은…


1928년 황해도 연안 출생. 1955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중앙미술학원에 다니다 사진집 ‘인간가족’을 접한 후 사진에 빠졌다. 1957년 귀국해 부산에서 자갈치 시장등을 배경으로 다양한 표정을 카메라에 담았다. 1968년 동아일보사를 통해 1집을 낸 ‘인간’은 현재 14집꺼지 발간됐고 올가을 15집이 나온다. 올겨울에는 또 다른 표정을 담기 위해 에티오피아로 떠날 계획이다.  
#사람들#시장#시장,#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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