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국가 vs 개인, 철창속에 갇혀 끝도 없는 말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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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2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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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안티고네’ ★★★☆

젊은 배우들의 들끓는 에너지가 돋보이는 연극 ‘안티고네’. 히서연극상과 기대되는 연극인상을 2010, 2011년 잇달아 수상한 극단 백수광부의 젊은 배우 박완규(뒤), 박윤정 씨가 연기 대결을 펼친다. 극단 백수광부 제공
젊은 배우들의 들끓는 에너지가 돋보이는 연극 ‘안티고네’. 히서연극상과 기대되는 연극인상을 2010, 2011년 잇달아 수상한 극단 백수광부의 젊은 배우 박완규(뒤), 박윤정 씨가 연기 대결을 펼친다. 극단 백수광부 제공
밖은 한겨울 칼바람이 매서운데 배우들 대부분은 맨발이다. 대부분 얇은 옷 한 장 걸쳤을 뿐이고 아예 웃통을 벗은 남자배우도 있다. 을씨년스러운 지하 소극장 무대는 객석을 둘로 나누고 그 가운데 설치된 것은 사각의 철창이다. 바닥엔 모래까지 깔렸다.

대형 로프 2개까지 매달려 불법 격투기장을 연상시키는 그 공간은 치열한 싸움터로 바뀐다. 사내 대 사내의 싸움도 아니다. 노인과 처녀의 싸움이다. 몸과 무기가 맞부딪치는 싸움이 아니다. 눈빛과 고함소리로 상대를 제압하려는 기(氣)싸움이요, 상대의 이성적, 감성적 약점을 파고들어 매서운 독설을 날리는 말싸움이다.

노인(크레온)은 계엄령하 국가최고회의 의장이다. 처녀(안티고네)는 그의 귀여운 며느릿감이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싸움이 가당키나 한가. 이유는 한때 공주였던 처녀의 두 쌍둥이 오빠가 대권을 놓고 ‘개싸움’을 펼치다 서로를 죽인 데서 비롯한다.

망나니 형제의 외삼촌인 노인은 그 어부지리로 대권을 거머쥔 뒤 국가윤리 확립을 위해 ‘긴급명령 18호’를 발한다. 망나니 형제 중에서도 그나마 정부군을 이끈 동생에겐 최고의 장례를 치러주되 이웃나라 군대를 끌고 온 형의 시신의 경우는 매장마저 금했다. 한데 ‘왕’의 며느릿감이 이를 정면으로 무시하고 막내 오빠의 시신을 매장하려다 체포된 것이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테베의 전설을 극화한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극단 백수광대의 ‘안티고네’(김승철 재구성·연출)의 초반 설정이다. 안티고네 남매가 테베의 저주받은 왕 오이디푸스의 자녀이자 형제자매라는 맥락을 생략하고 현대적 계엄령 상황을 가미한 점을 제외하곤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크레온과 안티고네는 초반부터 견원지간처럼 싸우기 시작한다. 사실 그들의 영원한 불화는 서구철학의 주요 화두였다. 헤겔은 이를 국가이성 대 자연도덕의 투쟁으로 해석했다. 페미니즘 이론가들은 남성적 권력욕 대 여성적 모성애로 풀어냈다. 라캉은 이를 인간의 상징질서 대 이를 무화시키는 ‘미친 자연’의 충돌로 봤다. 아감벤은 인간 생사를 관리하는 ‘생체권력’ 대 그 바깥에 위치하면서 그 권력의 위선을 폭로하는 ‘벌거벗은 생명’으로 분석했다.

하지만 연극의 관심은 이처럼 풍성한 해석과 섬세한 분석에 있지 않다. 그들의 명분 내지 신념의 내용과 상관없이 함께 파멸을 맞는 순간까지 멈출 줄 모르는 그 싸움의 형식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하이몬 역의 박완규와 안티고네 역의 박윤정은 땀과 눈물, 침, 모래까지 범벅이 된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끝이 없을 것 같은 말싸움을 펼친다.

그것은 분명 찬반토론이란 형식논리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해 타협이나 상생이 불가능해 보이는 한국적 토론문화를 겨냥한 것이리라. 그렇다면 크레온과 안티고네는 극중에서 서로 목을 찌르고 죽은 안티고네의 쌍둥이 오빠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의 변주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를 위해선 크레온과 안티고네의 논쟁은 어느 한편으로 기울어짐 없이 팽팽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연극이 주 텍스트로 삼은 프랑스 실존주의 극작가 장 아누이의 희곡은 안티고네를 개인적 양심의 자유를 지키려는 불멸의 반항아로 그리면서 크레온은 상대적으로 노회하고 부패한 정치권력의 화신으로 그렸다. 게다가 한국의 계엄정권을 연상시키는 극적 장치들로 인해 둘의 대결은 ‘민주 대 독재’라는 너무 뻔한 프레임에 갇혀버렸다. 연극의 들끓는 에너지가 극장 안에서만 자꾸 맴도는 이유이기도 하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i: 2010년 초연작의 앙코르 공연. 26일까지 대학로 선돌극장. 2만5000원. 02-814-1678
#공연#안티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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