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잣집-천막촌 전전하던 상고생 38년 담금질… ‘차관 신화’ 쓰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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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벌 장벽’ 깬 김동연 재정부 2차관 인생역정

김동연 신임 기획재정부 2차관은 9일 “없는 사람, 덜 배운 사람에게 우리 사회는 더 많은 기회를 줘야 한다”고 말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김동연 신임 기획재정부 2차관은 9일 “없는 사람, 덜 배운 사람에게 우리 사회는 더 많은 기회를 줘야 한다”고 말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열일곱 살에 은행에 취직해 가장(家長)이 된 일, 피곤한 몸을 이끌고 다녔던 야간대학 시절 직장과 대학을 병행하며 고시를 준비하던 시간, 그때는 너무 힘들던 일들이 결국 나에게 큰 도움이 됐다는 걸 이럴 때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전날 차관으로 승진한 김동연 기획재정부 2차관은 9일 정부과천청사 사무실에서 담담한 얼굴로 힘겨웠던 젊은 시절을 회고했다. 단정하고 부드러운 외모에서 쉽게 읽어낼 수 없는 고생 이력이다. 서울대 등 세칭 명문대와 명문고를 함께 나온 사람이 대부분인 재정부 공무원 중 그는 드물게 덕수상고, 국제대(야간) 법학과를 졸업한 ‘비주류’다.

“열한 살에 서울 중구 신당동에서 미곡 도매상을 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가세가 기울었어요. 청계7가 하천변에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어머니, 외할머니, 세 동생과 같이 살았습니다. 판잣집이 철거된 뒤 지금의 경기 성남시 수정구 단대동에 강제로 옮겨져 천막을 치고 살았죠.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취직을 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충북 음성군 출신으로 55세인 김 차관의 사회경력은 38년에 이른다. 상고 졸업반 때 한국신탁은행에 취직한 이래 지금까지 한 차례도 쉰 적 없이 달려왔다. 8년간 은행 등에서 일하면서 야간대를 다녔고 1982년 국회 사무관을 뽑는 입법고시(6회)에 합격했다. 같은 해 행정고시(26회)에도 붙어 이듬해 3월 경제기획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린 나이에 은행에 들어갔을 땐 우쭐했죠. 하지만 ‘고졸(高卒) 출신’이라는 현실의 벽은 높았고, 100m 달리기 경주에서 50m쯤 뒤처진 채 출발하는 답답한 기분이 들었어요. 야간대학을 다니고, 은행 합숙소 쓰레기통에 버려진 고시 관련 잡지를 보고 공무원시험 준비를 한 것 등이 젊은 날의 갈증을 푸는 돌파구가 됐지요.”

그가 재정부 예산실장을 맡으면서 ‘청년 일자리 지원’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 데는 이런 경험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 “최근 은행과 공기업들이 고졸 채용을 늘리는 건 대단히 고무적입니다. 없는 사람, 덜 배운 사람에게 우리 사회는 더 많은 기회를 줘야 합니다.”

상고 출신으로 옛 재무부, 경제기획원, 재정경제원, 재정경제부와 지금의 재정부를 통틀어 차관 이상의 고위 관직에 오른 사람은 김 차관을 포함해 최각규 전 경제부총리, 김동수 현 공정거래위원장, 반장식 전 기획예산처 차관 등 4명뿐. 강릉상고 출신인 최 전 부총리를 제외한 나머지 3명은 덕수상고 출신이다. 김 차관은 “당시 수도권에서는 집안이 어려운 수재들이 덕수상고에 많이 모였다”고 말했다.

상고 출신이어도 최 전 부총리는 나중에 서울대, 김 위원장은 고려대를 졸업했고 반 전 차관만 김 차관의 국제대 선배다. 상고, 야간대 출신이라는 ‘이중(二重)의 비주류 공직자’가 한국의 거시경제와 재정, 세제를 총괄하는 핵심 경제부처 차관 자리에 오른 것은 관가(官街)의 화제가 될 만한 일이다. 그는 “초기에는 학벌, 학연이 없어 손해 본다는 생각을 많이 했지만 끊임없는 자기 계발과 노력을 통해 이런 고민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30년간 공직에 있으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의 하나로 그는 지난해 예산실장으로 정부 예산을 짜던 때를 꼽는다. “몇 년 전 글로벌 금융위기 때 비어버린 나라의 곳간을 채워 넣는 게 앞으로 닥칠 수 있는 경제위기에 대응할 유일한 길이란 생각으로 각종 ‘포퓰리즘적 요구’를 뿌리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고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는 젊은 직장인들에게 김 차관은 이렇게 조언했다. “사람에 따라 공부의 때는 늦게 올 수도 있습니다. 꿈을 높게 갖고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지금의 어려움이 ‘위장된 축복’이란 걸 언젠가 깨닫게 됩니다.”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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