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메세나! 한국 기업은 요란하게,해외 기업은 조용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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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2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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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팅 상품으로 변질되는 기업들의 문화예술 후원 사업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 동아일보DB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 동아일보DB
#장면 1

4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로비에는 알리안츠생명의 부스가 차려졌다. ‘사전 초청한 고객님을 위한 공간입니다.’ 한쪽에서는 이 회사의 VVIP 고객을 위한 리셉션이 열렸다. 오페라 ‘리골레토’ 공연의 막이 오르기 직전 무대 위쪽에 설치한 스크린에 이 공연에 협찬한 기업 8곳의 로고가 큼지막하게 비쳤다.

#장면 2

지난달 15, 16일 열린 베를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내한공연은 삼성전자가 주최했다.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로비와 서울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로비에는 삼성전자 스마트TV 부스가 설치됐고 공연장 곳곳에 ‘삼성전자와 함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내한공연’ 포스터가 붙었다. 이 기업은 지휘자 사이먼 래틀의 사인회를 자사 TV 부스 앞에서 열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최근 공연장에서 기업의 명칭이나 로고를 접하는 일은 드물지 않다. 대형 오페라나 해외 오케스트라 공연을 무대에 올리려면 기업의 후원 없이는 쉽지 않은 일. 그러나 과도한 브랜드 노출과 티켓 대량 할인구매로 인해 예술행사가 기업의 노골적 마케팅용 상품으로 변질되는 사례도 적지 않다.

○ 협찬금보다 티켓 더 요구하기도

최근 이탈리아 페트루젤리 국립극장에서 오페라 ‘나비부인’을 들여온 솔오페라단은 전체 제작비의 5분의 2 정도를 기업 협찬으로 충당했다. 이소영 솔오페라단 단장은 “기업 협찬 없이 티켓 판매나 개인 기부만으로 공연을 올리면 좋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토로했다. 그는 “이번 공연에서는 협찬금의 30% 정도를 티켓으로 주었지만 티켓을 통으로 구매하고 협찬사라는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한 공연기획사 관계자는 “협찬이나 후원이라는 말만 그럴듯하지 몇천만 원을 주고 대폭 할인해서 티켓을 대량으로 가져가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항공사에서 해외 출연진의 좌석을 제공하는 대신 실제 항공권 가격의 2배가 넘는 값의 티켓을 가져가겠다고 해 거절한 적도 있다고 이 관계자는 전했다.

기업으로서도 할 말은 있다. 한 정유업체 관계자는 “기업은 자선단체가 아니다. 후원할 공연을 고를 때 기업의 브랜드 가치를 얼마나 높여줄 수 있을지 고려한다. 티켓을 사는 것도 공연을 돕는 셈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기업의 문화예술 후원의 전통이 깊은 유럽과 미국에서도 같은 말이 통할까. 이들 선진국에선 문화예술 후원을 통해 기업의 이미지를 높일 때도 나름의 ‘격조’를 갖춰야 하는 것이 사회적 합의다.

공연기획사 빈체로의 한정호 차장은 “선진국에서는 기업이 티켓을 가져가는 것은 전체 좌석의 5∼10% 미만”이라고 말했다. 국내에서도 이를 솔선수범하는 사례가 있다.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우리동네 음악회’를 후원하는 우리은행과 서울시향 정기공연을 후원하는 하나금융그룹이다. 그러나 이런 사례는 좀처럼 찾기 힘들다.

공연명 앞에 ‘OO와 함께하는’ 등의 명칭을 붙이는 일도 흔하다. 9월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열린 조수미 콘서트의 공식 명칭은 ‘현대캐피탈 인비테이셔널 조수미 파크콘서트’였다. 이 공연을 담당한 기획사에서는 각 매체에 “기사에 ‘현대캐피탈 인비테이셔널’ 문구가 빠지지 않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한 오케스트라 관계자는 “공연 관련 기사가 실릴 때 후원 기업명이 빠지면 ‘신경을 좀 써 달라’는 잔소리를 듣는다”고 귀띔했다.

○ 외국선 건물 지어줘도 개인 이름으로

기업이 공연장 건립을 지원하면서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의 ‘삼성카드홀’과 ‘삼성생명홀’, 예술의전당의 ‘CJ토월극장’과 ‘IBK챔버홀’처럼 기업명을 붙이는 사례도 늘고 있다. 공연장에 기업 이름을 붙이는 일은 개인 기부자가 대학과 병원 건물을 지어 주면서 적용하던 관행이 예술분야로 확대된 것으로 이 역시 한국적인 현상으로 꼽힌다.

개인 기부가 활성화된 외국에서는 개개인의 기부자 이름을 붙일 뿐 특정 기업 이름을 붙이는 일은 찾기 힘들다. 문화예술을 향유하는 장소가 기업의 입김에 좌우된다는 인상을 심지 않기 위해서다. 국내에서도 예술의전당이 CJ그룹으로부터 150억 원을 후원받아 토월극장을 리모델링하면서 이름을 ‘CJ씨어터’로 바꾸려다가 연극계의 반발에 부닥쳐 ‘CJ토월극장’으로 절충한 사례가 있다.

음악평론가 유혁준 씨는 “우리 기업들의 문화예술 후원은 단발성이 대부분이다 보니 최대한의 효과를 보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장기적, 지속적인 문화예술 후원이 정착돼야 지금과 같은 생색내기가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곽민영 기자 havefun@donga.com   
▼ “지원할 수 있는 게 영광… 공짜 티켓, 꿈도 안꿔” ▼

문화예술후원, 앞에 나서진 않는 해외 기업들

잘츠부르크 음악제 공식 후원기업인 아우디자동차는 자사의 리무진 차량 100여 대를 음악제에 의전용으로 제공한다. 잘츠부르크 주민들을 차량 운전사로 채용해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도움을 준다. 아우디코리아 제공
잘츠부르크 음악제 공식 후원기업인 아우디자동차는 자사의 리무진 차량 100여 대를 음악제에 의전용으로 제공한다. 잘츠부르크 주민들을 차량 운전사로 채용해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도움을 준다. 아우디코리아 제공
유럽 최고의 음악제 중 하나인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음악제’가 열리는 7월 말에서 8월이면 잘츠부르크 시내 곳곳에서 아우디자동차를 볼 수 있다. 아우디가 1994년부터 이 음악제를 후원해오면서 금전 지원과 함께 자사의 리무진 차량 100여 대를 의전용으로 제공하기 때문. 하지만 이 음악제와 관련된 현수막이나 팸플릿 등에서 ‘아우디와 함께하는’ 식의 노골적인 기업 노출은 찾아보기 힘들다. 후원사 로고만 작게 표시된다.

아우디는 이 음악제의 주요 후원기업이지만 공연 티켓은 공짜로 얻지 않고 모두 구매한다. 아우디코리아 홍보 담당 한동률 차장은 “기업이 후원사로서 가지는 특혜는 좋은 자리를 먼저 구매할 수 있다는 것뿐”이라며 “1920년부터 이어진 유서 깊은 음악제인 만큼 기업에서는 이마저도 아주 큰 혜택으로 여긴다”고 전했다.

독일 뮌헨에서 열리는 오페라 축제 ‘오페라 포 올’과 스위스 바젤에서 열리는 세계 3대 아트페어 중 하나인 ‘바젤 아트페어’의 공식 후원기업인 BMW그룹 역시 의전용 리무진 차량을 통해서만 후원기업을 노출한다. BMW코리아 주양예 홍보이사는 “이 같은 후원을 10여 년 꾸준히 하다 보니 BMW가 차만 파는 게 아니라 문화와 라이프스타일을 창조하고 나누는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며 “이제 사람들은 ‘오페라 포 올’ 하면 ‘BMW’를 떠올린다”고 귀띔했다.

이처럼 문화예술 강국에선 문화예술을 후원하는 기업이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는 암묵적 원칙이 작동하고 있다. 영국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기업의 후원 및 대가에 대한 내용을 매뉴얼로 만들어놓았다. 기업이 콘서트에 일정 금액을 후원하면 팸플릿과 프로그램 가이드, 웹사이트 등에 기업 로고를 실어주고, 오케스트라 단원과 기업 고객 간 만남을 주선한다는 내용이다.

취재를 위해 접촉한 외국계 기업들과 문화원 역시 ‘후원금’을 빌미로 매뉴얼 이상의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게 불문율이라고 설명했다. 프랑스문화원 홍보담당 심경아 씨는 “프랑스에선 기업의 메세나 활동이 당연시되면서 그를 통한 마케팅 효과에 크게 집착하지 않는 문화도 함께 정착됐다”고 말했다.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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