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그러진 풍경속에 숨은, 내가 보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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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0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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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의 취향이나 유행과 상관없이 우직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온 두 중진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최진욱 씨(55)의 ‘리얼리즘’전과 이상현 씨(56)의 ‘취유부벽루기(醉遊浮碧樓記)’전.회화의 본질에 대한 고민, 역사를 통한 오늘의 탐구 등 각기 고유한 세계를 지닌 이들은 부박한 현실에 순응하기보다 스스로를 고립해 세상에 질문을 던지는 점에서 닮아 있다. 탄탄한 사유와 자신에 대한 담금질을 토대로 일군 두 전시를 소개한다.》
■ 최진욱전 : 독특한 구도-영화적 화면 ‘재현의 회화’ 뛰어넘어

‘최진욱, 리얼리즘’전 내달 27일까지 일민미술관 서울 일민미술관의 ‘최진욱, 리얼리즘’전에 선보인 ‘서울의 서쪽’(1994년). 최 씨는 일반적인 사실주의 회화와 달리 거친 선과 격한 붓질로 채운 자신의 그림을 ‘감성적 리얼리즘’이라고 표현했다. 일민미술관 제공
‘최진욱, 리얼리즘’전 내달 27일까지 일민미술관 서울 일민미술관의 ‘최진욱, 리얼리즘’전에 선보인 ‘서울의 서쪽’(1994년). 최 씨는 일반적인 사실주의 회화와 달리 거친 선과 격한 붓질로 채운 자신의 그림을 ‘감성적 리얼리즘’이라고 표현했다. 일민미술관 제공
서울 종로구 세종로 일민미술관이 기획한 ‘최진욱, 리얼리즘’전은 알려진 작품 위주가 아닌, 지금까지 덜 조명된 작업과 만나는 기회다. 자화상, 화실 주변, 경주남산 풍경과 최 씨가 재직한 추계예대가 자리한 북아현동 연작까지 1990년대부터 근작까지 펼쳐냈다. 전시 제목과 달리 그림은 사실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서로 어긋난 캔버스, 일그러진 형태와 생경한 색채, 군데군데 빈 공간까지 보이는 그림을 작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일반적 사실주의가 아닌 감성적 리얼리즘이라고 할까. 이를테면 전장을 세세하게 묘사하는 것이 아닌, 그림 자체가 전장이 되게 하는 작업이다.”

그만의 리얼리즘을 표현한 그림의 내용도 친숙한 듯 모호하다. 전봇대와 정류장의 남녀가 한 작품으로 연결되고, 화실의 형광등을 그린 작품 등. 그에겐 스토리텔링이나 의도를 전하는 것이 관심사가 아니다. 사진이 있는데 왜 그려야 하는지, 그린다는 행위는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탐구한 회화다. “한마디로 정의하면 내 그림은 ‘그림과 생각’이다. 둘의 팽팽한 긴장이 중요하다. 내 작품을 보고 ‘이게 그림이냐, 무슨 이런 그림이 다 있어’란 질문이 나올 때 가장 좋은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모노크롬과 미니멀 회화가 휩쓸던 1970년대에 구닥다리로 취급받던 구상회화를 선택한 화가. ‘예술과 사회, 예술과 정치, 추상과 구상, 생태주의와 현실 참여’를 넘나들며 독자적 행보를 걸어왔다. 민중이든 모더니즘이든 편하게 무리에 섞이기보다 ‘마이 웨이’를 선택한 그에게 쉬운 그림이란 없다. 엄정한 자기성찰을 거쳐 1년에 완성된 작품은 10여 점. 북한 압록강 풍경과 폐쇄된 철로를 공원으로 만든 뉴욕 풍경이 엇갈린 작품이나 상하이임시정부와 관광객을 다룬 그림 등. 무심한 듯 보이지만 독특한 구도와 색감, 영화적 요소가 얽힌 작품은 묘한 끌림을 준다.

김태령 미술관장은 “정치적 현실에 대해 발언한 작가라는 기존의 경직된 평가에서 벗어나 회화 본질의 유연함, 사고의 유연함을 얻기 위해 그가 노력한 흔적을 보여주고자 한 전시”라고 소개했다. 회화의 가능성에 대해 묻는 그림들이 한데 모여 협소한 ‘재현의 회화’를 뛰어넘어 생각의 지평을 넓혀주는 전시다. 11월 27일까지. 무료. 02-2020-2060
■ 이상현전 : 디지털 접목한 판타지 인간의 욕망 신랄히 비판

이상현 ‘취유부벽루기’전 내달 11일까지 선컨템포러리 이상현 씨의 ‘취유부벽루기’전에 나온 ‘아버지냐 사랑이냐’(2011년). 옛 그림에다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이야기를 결합해 외세의 침략 앞에서 보호막이 곧 무너지려는 순간을 표현했다. 갤러리 선컨템포러리 제공
이상현 ‘취유부벽루기’전 내달 11일까지 선컨템포러리 이상현 씨의 ‘취유부벽루기’전에 나온 ‘아버지냐 사랑이냐’(2011년). 옛 그림에다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이야기를 결합해 외세의 침략 앞에서 보호막이 곧 무너지려는 순간을 표현했다. 갤러리 선컨템포러리 제공
김홍도가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평양 ‘부벽루 연회도’에 ‘소녀시대’가 등장한다(‘나는 너의 지니, 소원을 말해봐’). 또 다른 수묵화 ‘평안감사향연도’를 배경으로 미국 가수는 콘서트를 열고 있다(‘조미화친기념 레이디 가가 대동강 콘서트’). 남한 기업인이 북한에 가는 장면에서 1930년대의 애잔한 가요 ‘고향은 부른다’가 흐른다(‘정 회장 소 몰고 고향 찾는 대목’). 이런 기이한 풍경에 등장하는 북한 여군은 소총으로 무장한 채 군복에 샤넬 등 명품 로고를 달고 있다.

11월 11일까지 서울 종로구 소격동 갤러리 선컨템포러리에서 열리는 작가 이상현 씨의 ‘취유부벽루기’전에 나온 사진과 영상에는 어제와 오늘, 미래가 중첩돼 있다. 옛 그림과 첨단 디지털 기술을 접목해 판타지와 아이러니를 촘촘히 교직한 작업이다. 작가는 “내 작업은 디지털을 이용한 회화”라며 “김시습의 소설 제목과 인물을 빌려 영고성쇠, 역사의 허망함을 생각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역사와 분단을 소재로 했으나 사상과 혁명보다 강력한 인간의 욕망을 꼬집은 작업이다. 그는 “체제와 사상, 뭐 그런 것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 인생, 역사, 하늘과 나, 그리고 내가 살아야 할 것에 대한 사유”라고 설명한다.

이 전시는 2004년 ‘조선역사명상열전’에서 출발해 ‘구운몽’ ‘제국과 조선’ ‘삼천궁녀’ 등 역사를 근거로 사실적 판타지를 창조해온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다. 묵직한 주제를 아름다운 화면과 치밀한 영화적 구성으로 접근해 패러디와 은유, 경쾌함과 우수가 적절히 균형을 이룬다. ‘도 닦는 심정으로’ 숱한 인물의 얼굴과 포즈를 다르게 만든 장인적 노고가 돋보이고 작품마다 숨어있는 작가의 모습을 찾아보는 것도 흥미롭다.

외세에 의한 분단, 북한에 스며든 자본주의 문화, 남한의 돈에 대한 숭배와 오만을 같은 민족으로서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본 작가는 말한다. “파라다이스는 어떤 정치체제로도 만들지 못한다. 내 작업을 보며 관객이 자기 자신을 투영해보길 바란다.” 02-720-5789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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