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순간의 포착이냐 시간의 저장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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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7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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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를 펼친 공작새를 찍은 일본 원로 사진가 나카히라 다쿠마씨의 작품. 그는 ‘기리카에’전에서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 아니라 주변의 사물과 사람들을 연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도감 기법의 작업을 선보였다. 갤러리Six 제공
날개를 펼친 공작새를 찍은 일본 원로 사진가 나카히라 다쿠마씨의 작품. 그는 ‘기리카에’전에서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 아니라 주변의 사물과 사람들을 연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도감 기법의 작업을 선보였다. 갤러리Six 제공
어두운 극장 안에 텅 빈 스크린만 환하게 빛난다. 움직이는 영상도, 객석의 사람도 보이지 않으니 기둥과 천장 등 고풍스러운 장식이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이는 일본의 사진작가 스기모토 히로시 씨(63)의 ‘극장’ 시리즈 중 하나로 시간의 흐름을 담은 작품이다. 작가는 영화를 상영하는 두 시간 내내 카메라 셔터를 열어 놓고 장(長)노출 기법으로 사진을 제작했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 마이클슐츠갤러리(02-546-7955)에서 8월 21일까지 열리는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전은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스기모토 씨의 1970년대 작품부터 2000년대 이르기까지 20여 점을 선보였다. 별도 제작된 대형 카메라로 촬영해 고전적 실버 젤라틴 기법으로 인화한 흑백사진은 묵직한 고요함과 서정적 이미지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아 시간을 돌아보게 한다.

일본의 근대사진사를 대표하는 나카히라 다쿠마 씨(73)의 ‘기리카에’전은 경쾌한 컬러사진의 화음으로 이와 대비되는 전시다. ‘기리카에’는 ‘자기 변환’ ‘끊임 없이 변하는’이란 의미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일상의 정지된 풍경을 식물도감처럼 건조하게 찍어낸 듯한 원색 사진들이 액자도 없이 배열돼 우리에게 익숙한 사진전과 다른 풍경을 만나게 한다. 8월 28일까지 서울 용산구 한남동 콤데가르송 한남의 갤러리Six(02-749-2525).

○ 흘러간 시간을 잡아내다


스기모토 씨는 미니멀리즘과 선사상을 결합해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을 표현하는 작가. 그는 릿쿄대에서 정치학 사회학을 전공했으며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아트센터칼리지를 졸업했다. 1974년 뉴욕으로 이주한 뒤 유럽과 미국을 무대로 활동하고 있다.

이번에 선보인 작업은 사진과 회화의 벽을 넘나들며 내면의 울림을 자극하고 철학적 사유를 일깨운다. 정지된 시간이 아닌 유동적 시간으로 시야를 넓힌 ‘극장’ 시리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 삶의 무상함을 인식하게 한다.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듯한 ‘바다풍경’ 시리즈의 경우 인류가 최초로 바라본 태초의 바다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세계 곳곳의 바다를 찾아가 며칠씩 머물며 찍은 사진에선 원시와 현대의 시간이 하나로 맞물린다. 1997년부터 시작한 ‘건축’ 시리즈는 르 코르뷔지에의 롱샹 성당 등 20세기 건축물을 초점을 흐리게 찍어 윤곽만 드러낸 작업이다. 기록사진을 뛰어넘어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하는 건축의 ‘물질성’을 보여준다.

○ 정지된 순간을 기록하다

사진가 스기모토 히로시씨의 ‘극장’ 시리즈는 시간과 공간, 빛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카메라 셔터를 열어 장노출 기법으로 찍은 작품이다. 스크린은 하얀 빛의 공간으로, 어둠 속에 묻힌 내부 장식은 밝게 드러나면서 신비한 분위기를느끼게 한다. 마이클슐츠갤러리 제공
사진가 스기모토 히로시씨의 ‘극장’ 시리즈는 시간과 공간, 빛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카메라 셔터를 열어 장노출 기법으로 찍은 작품이다. 스크린은 하얀 빛의 공간으로, 어둠 속에 묻힌 내부 장식은 밝게 드러나면서 신비한 분위기를느끼게 한다. 마이클슐츠갤러리 제공
나카히라 씨는 도발적이고 파격적 사진으로 아라키 노부요시 등 동시대 사진가에게 영향을 미쳤다. 1960년대 활동 초기에는 거칠고 흐릿하게 피사체를 찍는 ‘부레보케’ 기법의 작업으로 주목받았으나 1970년대 후반 죽음의 고비를 넘긴 뒤 대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도감’ 기법으로 방향을 틀었다. 도감 기법으로 제작된 신작을 선보인 이번 전시는 작가의 메시지를 찾기보다 관람객이 주관과 철학을 바탕으로 읽고 싶은 대로 감상하는 자유를 선사한다.

전시장에 설치된 가벽 앞뒤에는 꽃나무와 공작새, 노숙인과 돌조각상 등 그가 요코하마와 오사카에서 스쳐 지나간 사람과 사물의 한순간을 또렷하게 포착한 근작들이 한 묶음으로 얼굴을 내민다. 같은 크기로 인화해 다닥다닥 핀으로 붙여 놓은 사진들. 우리가 함부로 흘려보내는 많은 것을 새롭게 바라보고 그 미묘한 표정의 차이를 살펴보도록 제안한다.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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