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만의 ‘자전거 식객’] 매콤달콤 병어조림… 촉촉한 살맛에 “난 네게 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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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6월 28일 07시 00분


10.증도~해남<상>

신안군 증도 안성식당에서 병어조림으로 아침식사를 하고있는 허영만 화백과 김성종씨(왼쪽부터). 아직 미혼인 김씨는 도시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와 아버지의 대를 이어 염전을 운영하고 있다.
신안군 증도 안성식당에서 병어조림으로 아침식사를 하고있는 허영만 화백과 김성종씨(왼쪽부터). 아직 미혼인 김씨는 도시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와 아버지의 대를 이어 염전을 운영하고 있다.
■ 증도서 만난 제철 ‘병어조림’

파도소리 자장가 삼아 해변 비박
악! 바다모기 등쌀…침낭 속 대피
양파 감자 깔고 자작자작 졸인 병어
밥 두공기 뚝딱…못먹어봤음 말을 마


집단가출 자전거 전국일주의 근간이 되는 몇 가지 원칙 중 하나가 텐트를 사용하지 않는 야영, 즉 비박(bivouac)이다.

비박은 등반활동 중 날씨나 지형 등 여건이 열악해 제대로 된 캠프를 구축할 수 없는 경우 최소한의 막영 장비만으로 밤을 지내는 비상 야영을 의미한다.

그러나 집단가출팀의 비박은 노숙(露宿)의 낭만을 즐기기 위해 ‘사서하는 고생’이다. 맨땅에 매트리스를 깔고 침낭 속으로 기어들어가 누웠을 때 들리는 바람소리, 물소리, 풀벌레소리, 그리고 별빛 가득한 밤하늘이 오감을 부드럽게 자극할 때 느껴지는 생존감과 경외감은 일단 한번 맛을 들이면 모텔이나 여관은 물론 특급호텔도 싫어지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전날 저녁 9시에 서울을 떠나 이튿날 새벽 3시에 도착한 전남 신안군 증도의 우전해변은 비박장소로 더 이상 바랄 게 없이 완벽했다. 비록 깜깜한 오밤중이지만 머리맡에서는 파도가 철썩이고, 발치에서는 해송숲이 우거져 있었는데 바람이 불 때마다 해송숲은 낮은 첼로소리를 내며 노숙하는 자전거 나그네들을 아늑하게 감싸 안는다.

하지만 우리는 자리에 누운 지 5분여 만에 저지대 비박을 할 때 가장 공포스러운 적들의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적의 정체는 다름 아닌 바다 모기. 모기들은 침낭 밖으로 노출된 얼굴을 집중 공격했는데 특히 귀를 물릴 경우 그 가려움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모기를 막기 위해 결국 침낭 커버의 지퍼를 완전히 닫아올렸는데, 바야흐로 여름의 한가운데에 와 있음을 실감한다.

지난해 9월 강화도에서 첫 페달링을 시작한 이후 가을, 겨울, 봄을 지나 이제 본격적인 여름이 왔음을 모기들이 무자비하고도 극성스런 방법으로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지도읍 5일장 별미 바삭한 오징어튀김
지도읍 5일장 별미 바삭한 오징어튀김

● 바다 모기 등쌀에 밤새 시달린 식객들, 병어조림으로 원기 회복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신안에서 염전을 경영하는 청년 소금농사꾼 김성종 씨의 안내를 받아 증도면사무소 부근의 안성식당을 찾았다.

메뉴는 요즘 한창 제철인 병어조림. 보통 비린 음식은 아침식사로 적당하지 않다고 막연하게 가졌던 선입견은 호박과 감자, 양파를 깔고 그 위에 병어를 올린 뒤 고춧가루와 마늘로 만든 양념간장을 자작하게 부어 끓인 병어조림 앞에서 깨졌다. 잠이 모자라 입맛이 없는 와중에서도 모두들 밥 두 공기를 깨끗이 비워낸다.

신안군 증도는 슬로시티국제연맹이 지정한 대한민국 공식 슬로시티(Slow City) 중 하나다. 슬로시티는 개발이 느려 자연환경이 잘 보존된 곳에 부여되는 명예로운 타이틀이지만 자전거를 타고 여행하는 우리들에게 슬로시티 증도는 정말로 슬로(slow)했다.

길이 워낙 꼬불꼬불한 탓에 가도가도 끝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신안의 풍경을 대표하는 것은 염전이다. 그동안 해안코스를 1500km 가까이 달려오며 곳곳에서 염전을 만났지만 신안의 염전은 규모면에서 단연 국내 최고다. 마치 모내기하기 전의 논처럼 보이는 소금밭이 광활하게 펼쳐져있고 소금밭을 따라 일렬로 늘어선 소금창고가 장관을 이루고 있다.

특히 증도와 사옥도는 한 마디로 소금마을. 사방 눈길 닿는 곳 어디나 염전이 있었고 우리의 자전거 행렬은 염전을 따라 이어졌다. 김성종 씨에 따르면 신안 소금의 품질은 세계적으로 톱클래스인데 그 비밀은 신안 청정해역의 깨끗한 바닷물과 증도, 사옥도, 지도 등 3개 섬을 이어 무안으로 이어지는 섬 길이다. 길고 길어서 평균 시속 15km의 자전거는 해가 높이 뜰 때까지도 섬을 벗어나지 못했다.

마지막 섬 지도에서는 마침 읍사무소 부근에 5일장이 섰다. 왁자지껄 시장 골목으로 들어서자 고소한 냄새가 침샘을 자극하며 발길을 붙잡는다. 노점 튀김집에서 퍼져나오는 튀김 냄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전거를 눕혀두고 노점 앞으로 달려가 앞다퉈 오징어튀김과 찹쌀 도너츠를 집어먹는데 이제 막 기름 솥에서 건져 올린 바삭하고 부드러운 튀김 맛은 아침 일찍부터 20여km를 쉼 없이 달리느라 출출해진 입에 착착 감긴다.

허화백이 자청한 지도 양파밭 품앗이
허화백이 자청한 지도 양파밭 품앗이

양파 수확기 맞은 지도는 온통 빨간색
대장 “밥 값 좀 하자” 밭으로 뛰어들어
품앗이로 받은 낙지비빔밥에 양파찬
달달한 즙이 톡…이것이 양파의 본맛


“오늘 목포까지 가야하는데 빠르면서도 차가 덜 다니는 한적한 길이 어딜까요?”

사실 빠른 길과 한적한 길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모순관계라는 점을 잘 알지만 일단 사람을 만나면 길부터 물어보는 것이 버릇이 되어있는지라 오징어 튀김을 씹으며 아저씨께 물어봤다.

“워메, 목포라? 자전거로는 징하게 먼디…. 현경에서 무조건 우회전하씨요. 그래가꼬 망운에서 무안공항 옆으로 해서 청계를 지나서 쪼∼옥 가면 거그가 목포요.”

아이패드 위성지도를 놓고 설명을 듣자 길이 명확해진다.

튀김 아저씨가 찐득한 호남사투리로 가르쳐준 길은 위험한 고속화도로를 타지 않고도 목포까지 최단거리로 갈 수 있는 국도와 마을 뒷길을 절묘하게 이은 코스였다.

1. 증도와 지도 사이의 섬 사옥도의 도로변에서 만난 천일염전. 어린 시절 부모님이 염전을 운영한 덕분에 소금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홍순영씨(오른쪽 빨간 배낭)가 허화백(맨왼쪽)과 필자에게 소금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2. 전남 무안은 지금 양파 수확의 계절. 허영만 화백(왼쪽 빨간 헬멧)이 지도 홀통 부근의 양파밭을 지나다 캐낸 양파를 망에 담는 작업을 돕고 있다.
1. 증도와 지도 사이의 섬 사옥도의 도로변에서 만난 천일염전. 어린 시절 부모님이 염전을 운영한 덕분에 소금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홍순영씨(오른쪽 빨간 배낭)가 허화백(맨왼쪽)과 필자에게 소금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2. 전남 무안은 지금 양파 수확의 계절. 허영만 화백(왼쪽 빨간 헬멧)이 지도 홀통 부근의 양파밭을 지나다 캐낸 양파를 망에 담는 작업을 돕고 있다.

● 명품 소금의 고향 증도와 사옥도, 양파의 산지 지도

증도와 사옥도가 소금의 섬이었다면 신안군의 육지쪽 마지막 섬인 지도는 양파의 섬이다. 높은 산이 없이 섬 전체가 부드러운 지형의 구릉지대인데 지도를 관통하는 24번 국도변이 끝없이 양파밭이다.

양파밭은 멀리서 척 봐도 알 수 있는 게, 밭이 온통 빨간색이다. 양파 수확기여서 밭마다 양파를 나일론 망에 담아뒀는데 그 망이 빨간색이어서 밭 전체가 빨갛게 보이는 것이다.

내륙인 무안과 직접 연결되는 홀통으로 점심식사를 하러 가는 길. 양파 담는 작업이 한창인 양파밭을 지나는데 허영만 대장이 슬그머니 자전거를 멈춘다.

“저 아주머니들 좀 봐라, 허리도 못 펴고 계속 일하고 계시잖아. 우리도 밥값을 좀 하자.”

밥 먹기 전에 양파 담는 작업을 도와주자는 얘기다.

난데없이 자전거쟁이들이 밭으로 뛰어들자 작업 중이던 아주머니들의 눈이 동그래졌는데 도와드리겠다고 말씀드리자 그렇지 않아도 힘들었는지 모두들 환호하며 반색을 한다.

하지만 막상 양파 밭에 들어서보니 엄청난 작업량에 기가 질린다. 길이 100m가 넘는 밭고랑에 캐놓은 양파가 고랑을 따라 수북한데 20kg들이 망에 상처나거나 썩은 것, 또 너무 작아 상품성이 떨어지는 놈들을 빼고 담는 것이 작업의 내용. 엉거주춤한 자세로 3망쯤을 채우자 허리가 아파 견딜 수가 없다.

“하루 종일 자전거를 타라면 타겠는데 이건 못하겠는데요?”

인내심 부족한 젊은 축들은 시간이 갈수록 질려 어쩔줄 모르는데 집단가출 자전거일주팀의 최연장자인 허영만 대장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아니, 아주머니들은 며칠째 하루 종일 하신다는데 고작 그거 담고 항복하려고? 안돼! 이제부터 천개 담고 허리 한번 펴기다.”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지난 뒤 “이래서는 오늘 안에 목포 못간다”는 푸념이 나오자 허대장은 그때서야 아쉬운 듯 손을 털고 일어섰다.

● 힘든 양파 품앗이 이후 받아든 낙지 비빔밥

홀통에서 유명한 무안 뻘낙지를 재료로 한 낙지비빔밥을 먹는데 밥상에 양파가 반찬으로 밥상에 올라왔다.

우리는 이 양파를 먹어본 뒤에야 몇단계 유통과정을 거쳐 도시민의 밥상에 오르는 양파맛과 방금 막 캐낸 양파맛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냥 된장에 찍어먹는 것 뿐인데 아삭하게 씹히는 식감과 향기, 그리고 마치 잘 익은 배를 베어물었을 때처럼 즙이 풍부해 그 자체로 훌륭한 음식이었던 것이다.

지난 겨울 충남 서산지역을 지날 때 고생스럽게 굴을 따는 할머니들을 만난 이후 어디서건 굴을 먹을 적마다 그 할머니들이 생각나곤 하는데, 이제부터는 양파를 먹을 때마다 양파를 캐고 담던 아주머니들의 사리비처럼 거칠고 마디 굵은 손이 생각날 것이다.

지도시장의 튀김 아저씨가 친절하게 일러준 길을 따라 시 경계선을 넘어 목포에 진입한 것은 오후 6시. 여기서 다시 유달산 일주도로를 한 시간 가까이 더 달려 비박지인 목포항 삼학마리나에 도착하자 자전거의 태코미터에는 에누리 없이 90km의 주행거리가 찍혔다.

삼학마리나는 지난해 집단가출호 전국일주항해 당시 들렀던 의미 있는 장소. 마리나에 떠있는 요트들을 바라보며, 바람을 타고 뱃길로 왔던 곳을 이번엔 자전거로 다시 찾은 감회에 젖어 이 날 밤 자전거 나그네들은 몇병의 소주를 추억과 함께 들이켰다.

사진|이진원 포토그래퍼
송철웅 아웃도어 칼럼니스트 timbersmit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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