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인터뷰]내 인생을 바꾼 사람 최태지 단장의 ‘임성남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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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6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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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아나도 찾아와 손잡은 분… ‘아버지’ 그 사랑 사무칩니다

최태지 국립발레단장의 꿈은 영원한 스승 임성남 선생의 숙원이었던 발레학교 건립이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최태지 국립발레단장의 꿈은 영원한 스승 임성남 선생의 숙원이었던 발레학교 건립이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오른팔을 어깨 위로 올릴 수 없었다. 낙랑공주가 높이 치켜든 오른손을 왼쪽 아래로 내리그어 자명고를 찢는 장면을 표현할 수 없었다. 기가 막혔다.1988년 8월, 서울올림픽 기념 ‘왕자호동’ 공연을 일주일 앞두고 국립발레단 프리마발레리나 최태지(52·국립발레단장)에게 닥친 시련이었다. 전날 연습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 빨래를 하려 할 때 징후는 나타났다. 아기기저귀를 세탁기에 집어넣으려는데 오른쪽 가슴 아래에 송곳으로 찌르는 듯 통증이 느껴졌다. 기저귀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발레를 시작한 지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무대에 설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설움이 북받쳤다. 그동안 아무리 힘들어도 혼자서 울음을 삼키며 참아냈지, 한 번도 못 하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다음 날. 용기를 냈다. “단장님, 죄송합니다. 한 말씀만 드릴게요. 가슴이 너무 아파서 못할 것 같아요.” 그러자 임성남 선생(2002년 작고·당시 국립발레단장)이 말했다. “당신이 올라가지 않으면 막은 올라가지 않아요. 이 대(大)국립발레단의 막이….”

순간 오른팔이 저절로 올라갔다. 달리 약이 필요 없었다. 일주일 뒤 공연은 순조롭게 끝났다. 임 선생이 말했다. “잘했다. 만족한다.” 병원에 갔더니 금이 간 갈비뼈가 붙어가는 중이라며 참 독하다고 했다. 내가…? 냉정한 임 선생님. 그런데 왜 이토록 선생님이 생각나는 걸까.

○ 나, 한국에서 일하고 싶어

오오타니 야스에(大谷泰枝·최태지의 일본명)에게 1980년대 초반은 혼란의 나날이었다. 그는 20년 남짓 귀화하지 않은 재일교포로 살면서도 자기 정체성을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2남 2녀 중 막내인 그는 금지옥엽이었다. 아버지는 “일본 애들이 배우는 것 이상의 교육을 시켜줄 테니까 모든 걸 자신 있게 하라”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어머니는 도쿄(東京)에서 혼자 발레공부를 하는 막내딸이 밤에 집에 올 때 위험하다며 딸에게 주려고 스포츠카를 교토(京都)에서 밤새워 몰고 오기도 했다. 때때로 발레학교의 고약한 일본인 급우들이 칠판에 ‘오오타니 야스에는 조선인’이라고 써서 가슴을 졸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그러나 1981년, 그의 정체성을 지탱해주던 마음속 보호막이 무너졌다. 일본 문화청(현 문부과학성)은 1970년대부터 일본 공연예술 종사자들이 선진문물을 배워오도록 해외연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야스에는 그해 다른 무용수 9명과 함께 해외연수 대상자로 내정됐다. 지원서 한 장만 제출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문화청에서 받은 지원서류를 펼쳤다. 첫 번째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대상-일본 국적을 가진 자’. 아찔했다. “문화적 쇼크(충격)였어요. 제 아이덴티티(정체성)가 뭔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죠.” 방황 끝에 이듬해 자비를 들여 프랑스 유학을 갔지만 야스에의 마음은 내내 ‘일본에 돌아가면 내가 활동할 공간이 있을까, 내가 일본에서 살 수는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1983년 초 일본에 돌아온 그를 안쓰러워한 일본발레협회 회장 시마다 히로시(島田廣·한국명 백성규) 선생이 불렀다. 히로시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연희전문(연세대 전신)을 졸업하고 일본에서 발레를 배워 일본 발레계의 거목이 된 재일교포였다. 그러나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밝히지 않았다. 다만 발레계 주변에서는 “히로시 선생이 조선인이래”라는 수군거림은 있어 왔다.

“야스에, 한국에 가서 임성남 군을 한번 만나보세요. 내 제자입니다. 지금 국립발레단 단장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간다? 부모님 손에 이끌려 아버지 고향인 경남 의령에 가본 게 10여 년 전이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당시 부산에서 차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덜컹거리며 2시간가량 가면서 학을 뗐다. 보잘것없는 집들과 청결하지 못한 거리를 보고는 “어떡해…. 나, 돌아갈래” 하며 도망치듯 돌아선 기억이 한국에 대한 전부였다. 그런데 한국을 간다? 그 순간 히로시 선생의 다른 어떤 말보다 ‘국립(國立)’이라는 말이 머리에 꽂혔다. 나라가 세운 발레단? 나라…. 가보자고 결심했다.

1983년 5월이었다. 트렁크 하나에 옷가지와 발레복만 챙겨서 서울에 왔다. 장충단공원에서 국립극장으로 가는 남산의 언덕배기를 걸어 올랐다. 하늘은 참 파랬다. 공기는 맑고, 일본과는 달리 습기도 없고, 아주 깔끔했다. 국립극장 로비에서 임 선생님이 야스에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걸어왔다. “그때였어요. 선생님을 보는데 그냥 ‘아, 한국에서 일하고 싶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어요.” 야스에가 최태지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 태지, 네가 필요하다

1983년 10월 국립발레단의 객원 무용수로 ‘셰에라자드’의 주역을 맡으며 한국 무대에 데뷔한 이래 그는 승승장구했다. 당시 한국보다는 좀 더 발전된 일본 발레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그의 발레는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평단과 관객의 호평이 이어졌다. 임 선생도 신이 났다. 임 선생은 생전에, 한 인터뷰에서 가장 좋아하는 스타일의 발레리나로 ‘세기의 발레리나’라 불리는 영국의 마고 폰테인(작고)과 함께 최태지를 꼽았다.  
▼ 한국에서 나의 아버지는 임 선생님이셨다 ▼

그러나 최 단장은 그의 전성기에 발레에서 ‘도망가기’를 거듭했다. “20, 30대 초반까지는 발레에서 도망가고 싶었어요. 발레가 너무 부담스러웠어요. 발레를 배울 때도 ‘결혼할 때까지만 하자’는 생각을 했거든요.” 결혼 때문에, 둘째를 낳기 위해서 그는 발레를 떠났다. 그때마다 그를 찾아와 함께하자며, 네가 필요하다며 이끌어줬던 사람이 임 선생이었다. 다른 제자나 단원에게는 “연애하지 말 것, 결혼하지 말 것”을 엄격히 강조했던 임 선생이었지만 최 단장에게는 항상 너그러웠다. 그러나 1989년 둘째를 낳으라는 시댁의 성화와 가족을 이루려면 아이가 한 명 더 필요하다는 생각 끝에 발레를 두 번째로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는 임 선생도 참지 않았다. 사표를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최 단장은 국립발레단 공연과에 사표를 내던지듯 하고는 눈물을 흘리며 도망갔다. 이후 2년여 임 선생은 최 단장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1991년 어느 날이었다. 옥수동 자신이 살던 아파트 앞 상가 3층에 차린 ‘최태지발레학원’으로 임 선생이 찾아왔다. “태지, 그래도 네가 필요하다.” “선생님, 저 못해요. 저는 아이들 키우면서 발레 가르칠 거예요.” 며칠 뒤 또 찾아왔다. “태지, 정말 네가 필요하다.” 말 그대로 삼고초려였다. 최 단장의 마음이 흔들렸다. 임 선생은 최 단장의 당시 남편과 시댁에 ‘아내가, 며느리가 발레를 다시 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며 편지를 보내기까지 했다. 그리고 최 단장은 무대에 다시 섰다. 임 선생도 다시 신이 났다. ‘돈키호테’ 주역을 맡아 연습을 하는 최 단장을 보고는 “애기 둘 낳으니까 하나였을 때보다 (무용이) 더 괜찮네” 하며 만족스러워 했다.

“어디 무용수가 없어서 저를 그렇게 찾으셨겠어요. 선생님은 항상 저를 지켜봐 주셨고, 믿어주셨어요. 무용수 최태지를 오로지 예술인으로 봐주셨죠.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저를 한 번도 배신하지 않으셨어요.”

○ 나의 가족, 임성남

1992년 임 선생은 30년간 맡아온 국립발레단 단장직에서 물러났다. 발레계 일각에서 ‘임성남 독재’라는 소리까지 나오던 터였다. 임 선생이 퇴임한 뒤 국립발레단의 주요 무용수들이 유학을 간다, 발레를 가르치겠다며 잇따라 탈퇴했다. 임 선생은 최 단장에게 “같이 발레단을 만들어 함께하자”는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최 단장은 남았다. 임 선생은 섭섭했다. 배신 아니었느냐고? 최 단장은 한동안 침묵했다. “죄송스러운 마음이지요. 그때 힘이 되어드려야 했는데….”

최 단장은 임 선생에게 편지를 썼다. ‘선생님, 제가 선생님이 아닌 다른 누구 밑에서 일하려는 게 아니고 국가를 위해 일하려는 겁니다. 그 마음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언제나 선생님 옆에 있습니다. 부르시면 항상 달려갈게요.’ 물론 그 편지만으로 임 선생의 마음을 풀어드릴 수는 없었음을 최 단장은 잘 알고 있다. 이후 두 사람의 관계가 편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2000년 최 단장이 국립발레단을 재단법인화하면서 초대 이사장에 모셨을 때 임 선생은 흔쾌히 허락했다.

한국말을 한마디도 못했던 야스에가 ‘반쪽발이’ 소리를 들어가며 최태지로 살면서 의지했던 인물이 임 선생이었다. 우리말이 서툰 최 단장이 누구에게도 말 못할 이런저런 고민을 일본말로 들어주며 언제나 ‘잘하고 있다’고 다독여준 분이었다.

후배에게, 단원에게 또 다른 ‘임성남’이 되고픈 최태지는 말한다. “선생님은 여기(한국) 아버지였어요. 가족이었죠. 선생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제게 길을 열어주지 않으셨다면 한국의 최태지는 없었을 거예요.”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임성남 선생은…

한국 발레의 선구자로 불리는 임성남 선생은 1929년 서울에서 태어나 6·25전쟁 직후 일본에 건너가 하토리·시마다 발레단, 도쿄청년발레단에서 주역 무용수로 활약했다. 1954년 귀국한 이후 임성남발레단을 결성해 활동했다. 1962년 현 국립발레단의 전신인 국립무용단 단장에 취임해 1992년까지 국립발레단 단장을 맡으며 ‘한국 발레 최고의 스승’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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