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인터뷰]내 인생을 바꾼 순간 시인 마종기의 1957년 생일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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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6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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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과 가려던 내게 동주선생은 과학을 권했다

이국에서 모국어로 시 쓰기 45년. 시인 마종기는 운명 같은 삶을 그 긴장의 틈바구니에서 지탱해 왔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이국에서 모국어로 시 쓰기 45년. 시인 마종기는 운명 같은 삶을 그 긴장의 틈바구니에서 지탱해 왔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이상한 일이었다. 중고등학교 6년 동안 시인 마종기(72)의 삶은 문학을 빼놓고는 성립되지 않았다. 숱한 문인의 등용문이었던 청소년 교양잡지 ‘학원’의 문학상을 휩쓸고, 서울고 다닐 때는 문예반(신문반) 반장으로 콧대가 높았다. 당시 학교 학생회장 내정자가 쓴 글을 읽고는 ‘가소롭다’며 학교신문에 실어주지도 않았다. 주위의 어느 누구도 그가 문학을 업으로 삼아 남은 생을 채워갈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그의 마음속에는 무엇을 할지, 무엇이 될지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서울대 원서 접수 마감이 20일도 채 남지 않은 1957년 1월 17일 밤 그가 터벌터벌 동주 이용희 선생(작고) 댁으로 향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들아, 너는 오늘도 떠나는구나.
무한정의 하늘을 향해 떠나는구나.

-시 ‘외로운 아들’ 중


어느새 이슥해진 골목길은 춥고 어두웠다. 동주 선생 댁을 나와 같은 골목에 있는 집까지 내디딘 100여 걸음 내내 그의 마음도 어두웠다. “과학을 하게.” 선생의 이 한마디에 그는 혼비백산했다. ‘내 인생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한 시간여 전. 부친(아동문학작가 마해송 선생·작고)과 절친했던 후배 학자 동주 선생의 안방에서 가진 이른바 진학 상담은 화기애애하게 시작됐다. 당시 서울대 정치학과(정확하게는 외교학과) 교수였던 동주 선생은 시인을 어렸을 때부터 아꼈다. 한국 국제정치학계의 태두인 동주 선생은 시인의 부친보다 나이는 10여 년 어렸지만 광복 직전부터 당시까지 10년 넘게 같은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 살면서 각별한 관계였다. 시인이 전공 선택을 위해 동주 선생에게 조언을 구하겠다고 하자 “그분밖에는 없다”며 반긴 이도 부친이었다.

정치학과를 가고 싶다고 말문을 열었을 때까지는 괜찮았다. 그러나 왜 정치학과를 가려 하느냐는 질문에 “신문기자를 하기 위해서”라고 답하자 선생은 정색을 하며 쏘아붙였다.

“우리나라 같은 가난한 나라에서 제일 필요 없는 것이 정치, 정치학이다. 공부도 잘하고 똑똑하다고 알려진 네가 정치학을 공부하겠다니…. 지금 같은 시대에는 너 같은 젊은이들이 과학을 배워 나라에 도움이 되고 가난을 극복해야 한다.”

절실히 조언을 구하는 마음이었기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동주 선생의 말은 지극히 간절하게 들렸다. 학문적으로는 제자들에게 꼬장꼬장했지만 다른 한편 한국 회화의 최고 권위자로 풍류를 즐길 줄 알던 동주 선생은 자신의 친조카에게 얘기하듯 자상하면서도 절절하게 시인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때 한 시간 만에 90%는 (마음이) 바뀌었죠. 마음속에서 뭔가 ‘클릭’하는 게 있었던 것 같아요.”

집에 돌아와서 부친을 붙잡고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했다. 문과에서 2년여를 공부했는데 과학 계통을 공부하라고 하니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고 푸념을 해댔다. 그때 부친은 시인의 고모에 대해 처음 이야기했다. 당찬 신여성이었던 시인의 고모는 일본에서 의대를 졸업한 뒤 경성의전(서울대 의대 전신) 내과 교수로 있다 30대에 아깝게 요절했다. 시인이 태어나기 전의 일이었다. 그러니 너도 의학을 하면 어떻겠느냐는 부친의 뜻이 담겨 있었다. 시인의 장래에 대해 부친이 소견을 밝힌 첫 번째 일이었다.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부친은 시인이 하는 일에 가타부타 의견을 낸 적이 없었다.

의사라…. 고민을 할 여유도 없었다. 마침 연세대 의대에서 문·이과를 가리지 않고 무시험·내신성적 전형으로 학생을 뽑았다. 서울대 문리대 옆에 살면서 서울대 교가를 외우고 다녔던 시인은 신촌에서 학창시절 6년을 보내게 됐다. 그건 시인 말마따나 ‘운명’이었다. 한 시간 만에 180도 바뀐 시인의 운명.

시인은 1966년 수련의 과정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 뒤 지금까지 45년째 그곳에서 살며 시를 쓰고 있다. 시인은 등단(1959년) 50주년을 보내며 지난해 낸 책 ‘당신을 부르며 살았다’(비채)의 서문에서 ‘외국어를 일상어로 쓰면서 모국어로 수백 편의 시를 써왔다면 그 인간의 가슴 어느 곳에 몇 개의 상처가 없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썼다. 그 상처들은 어쩌면 그가 의사의 길을 걷지 않았다면 생기지 않았을지도 모르리라.

멀리 있으면 당신은 희고 푸르게 보이고
가까이 있으면 슬프게 보인다

-시 ‘밤노래 4’ 중


“문인이 될 생각이 있었다면 그날 밤 동주 선생을 찾아가지 않았을 거예요.”

문인이 되기로 마음먹었다면 국문학과나 문예창작과를 쉽사리 선택했을 테고 그렇다면 하필 자신의 생일(1월 17일)에 갈 곳 몰라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시인은 문학이, 시가 자신이 가야 할 길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문학을 전공하고 싶지는 않았다고 했다. 인터뷰 초반, 시인은 자신의 경험에서 그 한 요인을 찾았다.

휴전 뒤 명륜동 시인의 집으로 당대의 시인이며 소설가들이 사람 아끼기로 유명한 부친을 자주 찾았다. 애주가였던 부친은 주로 후배들인 그런 객들과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문단이며 사회 전반에 걸쳐 이야기를 나눴다. 술이 좀 들어간 문인들은 “왜 이놈의 나라는 최고의 시인을 몰라주느냐” “문학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대접하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며 울분을 털어놓는 경우가 잦았다. 한번은 ‘1등 시인’을 자처하던 한 시인이 집에 와서 부친과 대작을 하고 있었다. 때마침 부친을 찾아온 다른 시인이 들어서자 “너는 2류 시인이니까 마당에서 무릎 꿇고 술 먹어”라고 불호령을 내렸고, 대청마루에 못 올라오고 엉거주춤 서 있던 그 시인은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문인들의) 자의식이 너무 강하다고나 할까. 그런 풍경이 역겹다고 느껴졌어요. 객관적인 가치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 하고…. 저런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고 느꼈어요. 글을 써도 내가 만족하고 남들한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된다면 나는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하지만 인터뷰가 이어지면서 시인은 묻어두었던 속내를 조금씩 풀어냈다. 그 자리에는 부친이 있었다.

“아버지를 평생 제일 존경하면서, 그런 청빈과 정도를 지키시는 아버지의 선비정신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지요. 불의를 참지 못하고 평생 정규적인 직업을 한 번도 안 가지고 가난하게 사신 아버지의 뒤를 좇는다는 것이 겁이 났지요. 그래서 동주 선생님을 찾아갔고 아버지에게 허락을 받았지요.”

시인의 부친은 엄격할 정도로 청빈했다. 동아일보 1976년 10월 4일자에는 시인의 부친이 얼마나 대쪽 같았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나온다. 시인은 15세 때 부친에게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호되게 맞았다. 6·25전쟁 중 대구에서 셋방살이를 하며 잠시 피란생활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시인은 주인집에 온 신문을 먼저 보고는 다시 넣어둘 생각을 잊은 채 그만 셋방 툇마루에 던져 놓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부친은 시인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좁은 방 이 구석, 저 구석으로 도망 다니는 것을 따라다니며 가릴 바 없이 무지하게 때렸다. 죽어라고 때렸다’(마해송 선생의 수필 ‘너를 때리고’ 중에서). 우선 남의 신문을 말없이 본 것이 잘못이며, 제 욕심 챙기기 위해서라면 남의 생명까지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흔한 세상인데 신문 한 장 가지고 이러니저러니 하는 것은 당치 않은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준엄한 꾸짖음이었다.

결국 시인은 1957년 자신이 태어난 날 밤에 부친에게 ‘아버지를 따라서는 못 살겠다’는 것을 보여드린 격이 되어 버렸다. 더욱이 3남매 중 장남인 시인은 부친이 돌아가실 때 임종도 못 하고 장례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1966년 수련의 과정을 위해 미국에 온 지 넉 달 만에 부친은 뇌중풍(뇌졸중)으로 별세했다. 수중에 50달러밖에 없던 시인은 비행기표를 살 수 없었다. 아직까지도, 앞으로도 가슴이 아픈 까닭이다.

지난달 시인은 부친의 자필원고, 저서 초판본 등 자신이 소장하던 유품을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에 기증했다. 도서관 측은 이를 토대로 ‘마해송 문고’를 만들었다. 부모에게서조차도 아이들이 강요받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아동문학에 투신한 부친을 근거도 없이 ‘친일파’로 모는 학계 일부의 태도가 시인은 속상하기도 하다.

누구에겐가 밀려가며 사는 것도
눈물겨운 우리의 내력이다

-시 ‘담쟁이 꽃’ 중


시인은 말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미국에서의 45년간은 물 흘러가듯 운명의 목선을 타고 흘러간 결과였지요.” 1957년 그날 이후 시인의 삶이 그렇다고도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뭔가 어딘가 끌려가면서 살아온 것 같은 인생. 삶이라는 것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어떤 계획대로 살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다는 깨달음.

1965년 공군사관학교 군의관 시절 ‘한일 굴욕외교 반대 재경(在京) 문인 82인 서명’ 사건으로 혹독한 시련을 겪고 결국 미국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던 시인. 옥에 갇힌 장남의 안위에 애태우며 더욱 술로 날을 지새우시다 몸을 망친 부친. 남북 분단의 아픔을 짊어진 채 미국으로 건너와 살다 비명에 간 남동생….

“거창하게 생각하면 운명이지만 그런 이상한 인연들이 섞여서 인간의 삶을 끌고 가는 것 같습니다.”

얽히고설킨 인연이 그를 또 어느 항구에 정박시킬지 모를 일이다. 다만 그에게 시는 생명이고, 사랑이고, 희망이고, 하느님이고, 무조건적인 인간의 이해심과 베풂이다. 그는 언제나 그런 시를 쓰고 있을 것이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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