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야구와 인생

  • Array
  • 입력 2011년 6월 3일 11시 11분


코멘트
사람들은 말한다. 야구는 확률의 게임이라고. 그래서인가. 야구는 지금 내가 딛고선 삶의 터전과도 닮았다. 이대호가 아니라 이대호 할아버지가 무사 만루에 나와도 서너 번 중에 한 번은 파울플라이나 삼진을 당할 수 있고 8이닝 무실점으로 역투하던 류현진도 끝내기 홈런 한방에 패전투수가 될 수도 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마음대로 되는 부분보다 마음대로 안 되는 부분이 더 많기 때문에, 그래서 사람들은 야구와 인생이 닮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상일 한국야구위원회(KBO) 사무총장이 최근 프로축구 승부조작과 관련한 언론인터뷰에서 "수많은 경우의 수가 있는 야구에서 선수 한 두 명을 매수해서 승부를 한쪽으로 기울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라고 일축한 데서도 그 '경우의 수'의 무거움이 느껴진다.

사실 10대 20대는 스타플레이어나 선호하는 팀의 승패에 연연한다. 그러나 직업전선에 본격적으로 발을 담그고 있는 30대 이상 샐러리맨, 그리고 가장들은 좀 더 입체적인 관전 포인트를 갖고 있다.

필자는 프로야구선수를 보면서 증권사 투자 담당 부서의 영업맨을 떠올린다. 프로 선수들의 상당수는 엄청난 연습량에도 불구하고 주전에서 제외되고 모처럼 맞은 무사 1, 2루 찬스에서 병살타를 치는 일이 허다하다. 기업체를 돌아다니며 아무리 열심히 영업을 해도 계약을 성사시키지 못하는 증권사 영업담당도 같은 처지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운' 앞에 맞설 수 없다는 진리는 인생, 삶, 좁혀서 말하면 직장생활의 순간순간과 너무나도 닮았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초대대회에서 4강 위업을 달성한 김인식 전 한화이글스 감독이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김경문 당시 국가대표 감독을 일컬어 "지장(智將)이고 덕장(德將)이고 다 소용없고 운짱이 최고"라고 말한 사실은 그래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나친 논리의 비약인지는 모르나 이 때문인지 야구 혹은 야구 중계를 좋아하는 내 주변의 30, 40대들 중에는 드라마 보다 다큐멘터리를 더 좋아하는 습성도 보인다. 가공된 스토리라인에서 감동을 느끼기 보다는 야생의 우연성 속에서 느끼는 일체감과 동병상련(同病相憐)에 더 많은 점수를 주기 때문이리라. 병살타 치는 프로야구선수의 플레이 하나에 많은 의미부여를 하다보면 어느 드라마 한 장면 보다 더 많은 감정의 정화를 체험하게 된다.

양준혁이 은퇴 후에도 ‘양신’으로 추앙받는 이유는 뛰어난 성적을 거뒀을 뿐 아니라 아웃이 될 걸 뻔히 알면서도 전력질주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DB
양준혁이 은퇴 후에도 ‘양신’으로 추앙받는 이유는 뛰어난 성적을 거뒀을 뿐 아니라 아웃이 될 걸 뻔히 알면서도 전력질주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DB
2루타를 단타로 막거나, 다이빙 캐치 하나로 분위기를 반전시킨 뒤 다음 이닝에서 대거 역전을 시키는 장면을 보면서 사람들은 야구를 '멘탈의 게임' 이라고도 한다. 기량이 뛰어난 운동선수들을 학창시절에 접해본 사람들은 이들이 대체로 당구나 도박에도 강하다는 사실이 떠오를 것이다.

'잃을 때는 조금씩, 딸 때 왕창 따는' SK와이번스 선수들처럼 기본이 돼있는 야구를 하는 이들은 증권회사 직원 입장에서 보자면 대단히 현명한 투자자이고, 반대편에서 보면 얄미운 투자자이기도 하다.

상승장에서 흥분해서 이 종목 저 종목 질러대다 결국 '털리는' 투자자들, 높은 값에 샀다가 매도기회를 놓치고 줄 하한가 치는 종목을 보면서 망연자실하는 투자자들도 있다. 반면 하락장세에서도 요령 있는 손절매를 통해 손실을 크게 줄이는 사람도 있다. 모두 야구처럼 '멘탈'의 문제로 귀결되는 대목이다.

증권계에서는 한번 '맛'을 본 투자자가 계속 투자를 잘한다는 말을 한다.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추신수가 2할9푼 몇 리를 치다가 결국 1년 통산으로는 3할대를 이룬 적이 있었는데, 이 역시 "3할을 쳐 본 사람이 3할을 또 치게 된다" 는 야구 격언과 일맥상통한다. "우승을 해 본 자 만이 우승을 할 줄 안다"는 격언도 따지고 보면 멘탈의 선순환 고리(어려운 상황-자신감-즐김으로써 극복)에서 파생된 것이리라.

요즘 오디션 프로그램의 흥행코드는 '진정성'이다. 혼을 실어 노래하는 가수와 가수지망생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감동을 받는 것이다. 야구의 흥행코드 역시 진정성이다.

초고속 카메라로 촬영한 그림 같은 슬로우 화면을 내놓는 요즘의 프로야구 중계 덕분에 표정을 통해 '진정성 있는 플레이'를 구별해 내는 게 그다지 어렵지 않다. 단지 스트라이크 판정을 놓고 심판에게 투정을 부리는 선수에게서 진지함을 느끼기는 쉽지 않지만, 3대 2로 뒤진 9회말 1사 2루에서 어떻든 선행주자를 진루시키려 방망이를 움켜잡고 강속구를 최소한 스치듯 맞춰서 파울을 만들어내고, 그러다 인코스 볼이 오면 오히려 안다리를 들이밀며 몸에 맞으려는 이들을 보면 간절함 마저 느껴진다.

경우의 수와, 운과, 확률을 그나마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는 변수는 이 진정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또 불공정, 불평등해 보이는 우리 사회, 직장에서도 어느 정도 보상이 돌아온다는 위안이 생긴다. 솔직히 매일 밤낮없이 일하는 사람들 중에 좋지 않은 고과를 받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증권사 기업금융인들을 생각해 봐도 마찬가지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은 영업이라도 마르고 닳도록 자료를 만들어 주고 신발이 닳도록 고객사를 다니며 노력한다면 언젠가 해당 기업에서 자금조달을 할 때 대표주관사 선정이라는 달디 단 열매는 그 사람 몫일 것이다.

신간 '만약 고교야구 여자 매니저가 피터드러커를 읽는다면'에는 필자가 앞서 풀어놓은 키워드들이 대부분 등장한다. 여자주인공이자 도쿄 호도쿠보 고등학교의 야구단 매니저로 일하는 미나미가 우연히 읽은 피터드러커의 경영학 고전 '매니지먼트'를 읽고 훌륭한 매니저로 탈바꿈, 결국 만년 꼴찌 학교에 고시엔 대회 우승을 안긴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책을 관통하는 제일 큰 명제는 "재능보다 중요한 것은 진지함(진정성)"이다.

단타를 치고 1루를 향해 전력질주를 한 진정성의 사나이 양준혁은 은퇴 후에도 팬들에게 '양신'으로 추앙받는다. 그렇듯이 비록 승진에 실패하고 임원 명단에서 빠지더라도 가족에게, 친지들에게 '열심히 살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존경받을 수 있는 이 땅의 회사원들이야말로 진정한 국가대표 '스타플레이어'다.

조인직 대우증권 IPO부 차장 cij1999@naver.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