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와 둔황’ 특별전]우리가 ‘젊음’이라고 아끼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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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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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탁환 내 마음속의 혜초

바닷길·사막길 누빈 한반도 최초의 ‘배낭족’ 혜초
실크로드에서 겪은 이야기 길 안내판 ‘왕오천축국전’

산맥과 산맥 사이에 끝없는 사막이나 암석이 겹겹이 쌓인 고원지대인 총령(파마르 고원). 험난한 길이었지만 실크로드의 한 축으로, 혜초가 이 길을 지날 때 파미르 고원은 당이 점령하고 있었다. 사진 제공 두레
산맥과 산맥 사이에 끝없는 사막이나 암석이 겹겹이 쌓인 고원지대인 총령(파마르 고원). 험난한 길이었지만 실크로드의 한 축으로, 혜초가 이 길을 지날 때 파미르 고원은 당이 점령하고 있었다. 사진 제공 두레
유럽에 마르코 폴로가 있고 중국에 현장이 있다면, 우리에겐 혜초가 있다. 그들의 여정이 담긴 지도를 겹쳐 놓고 비교해도, 혜초의 스케일은 다른 여행가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다. ‘서유기’에 등장하는 삼장법사의 실제 모델인 현장은 바닷길을 가지 않고 불교가 전파된 지역만 육로로 살피고 돌아왔다. 실크로드의 바닷길과 사막길을 모두 누비고 여행기를 남긴 이는 혜초가 처음이다.

가고 싶은 곳과 갈 수 있는 곳은 다르듯이, 쓰고 싶은 작품과 쓸 수 있는 작품은 다르다. 평생 쓰기를 갈망하지만 끝내 도전을 못하는 작품도 있는 법이다. 내게는 혜초를 소설로 옮기는 일이 그랬다. 스무 살에 처음 ‘왕오천축국전’을 읽었고, 서른 살에 소설 구상을 마쳤지만, 마흔 살에야 집필을 시작한 소설. 20년 동안 대여행가 혜초는 내 앞을 밝히는 등불이자 도전하고픈 거대한 적이었다.

나는 왜 혜초(704∼780년경)에게 매혹되었을까. 무엇보다도 우리가 ‘젊음’이라고 아끼는 것들을 통일신라시대의 이 학승이 고스란히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상을 초월한 이 젊음의 장쾌함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723년 여행을 시작할 때 혜초의 나이는 불과 열아홉 살이었고, 727년 당나라 안서도호부 구자에 도착했을 때는 스물세 살에 지나지 않았다. 5년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 동안 인도를 거쳐 지금의 이란까지 나아갔다가 파미르 고원을 넘어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왔다. 다른 여행가들이 마음에 드는 도시 혹은 사찰에 몇 달 혹은 몇 년씩 머문 것에 비해, 혜초는 낯선 마을들을 여독을 풀고 새로운 여행을 준비하는 짧은 휴식처로만 여겼다. 이 길에서 저 길까지 쉼 없이 걷는 혜초를 상상하며, 나는 농담 반 진담 반 그를 한반도 출신 최초의 배낭족이라고 부르곤 했다.

혜초의 매력은 그가 쓴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에서 뿜어나온다. 세상의 모든 여행기는 ‘열하일기’와 ‘왕오천축국전’ 사이에 놓인다. 순간순간 닥쳐오는 새로움들을 다채로운 형식과 문체로 오롯이 담아낸 것이 ‘열하일기’라면, 그 모든 다양함에서 핵심만 뽑아내어 간명한 단 하나의 형식과 문체로 정리한 것이 ‘왕오천축국전’이다. 또한 혜초는 자신이 직접 체험한 것과 여행 중에 전해들은 정보들을 엄격하게 분리하여 적었다. 체험과 견문이 뒤섞여 실제 여정을 파악하기 힘든 몇몇 여행가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정직함이다.

2007년, 나는 ‘혜초의 길’로 답사를 떠났다. 경주를 시작으로 인도와 이란과 우즈베키스탄을 거쳐, 타클라마칸 사막도시 쿠차를 거쳐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이 둔황이었다. 답사는 힘겨웠지만 감히 불편함을 내색할 순 없었다. 우리가 버스와 기차와 비행기로 옮겨간 길들을 혜초는 오로지 두 발로 걸어서 지났다. 가장 추운 땅에서 가장 더운 땅까지, 넓디 넓은 대로에서 인간의 족적이 사라진 길 아닌 길까지. 죽음이 이마를 비벼댈 때도 많았으리라.

혜초는 대부분의 여행기에 그득 차고 넘치는 길 위에서의 희로애락을 담지 않았다. 그 모든 아우성들을 침묵의 영역으로 밀어넣은 혜초는 담담하게 “북쪽으로 이레를 가면” “서쪽으로 한 달을 가면”이라고 적었다. 나는 이 단순한 문장들의 무게를 혜초의 길을 따르며 뒤늦게 깨달았다. 공포와 배고픔과 슬픔을 감추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그러나 혜초는 손끝까지 밀려온 감정을 거친 발바닥으로 밟은 채 지나갔다. 이 참기 힘든 고통마저도 수행의 과정으로 받아들인 학승의 젊음이 빛나는 대목이다.

혜초의 길에서 한반도를 떠나온 또 다른 선조들과 조우했다. 둔황석굴은 물론이고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의 아프라시압 벽화에서도 조우관(鳥羽冠)을 쓴 이들이 나를 향해 서 있었다. 실크로드에서 그들이 겪은 파란만장한 일들을 유장한 이야기로 어서 풀어달라는 소리가 귀에 쟁쟁거렸다. ‘왕오천축국전’은 그 이야기 길의 충실한 안내판이기도 했다.

‘실크로드의 악마들’이란 책에서 보듯이, 실크로드를 여행한 근대 서구의 모험가들 중에서 상당수가 그곳의 벽화, 석상, 전적 등을 약탈해갔다. 프랑스인 펠리오 역시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가 둔황 17호 석굴에서 가져간 두루마리 중에 ‘왕오천축국전’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둡고 텅 빈 석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참담했다. 문화재들이 처음 탄생한 자리에 있지 않고 제국의 웅장한 박물관으로 옮겨진 것 역시 근대가 지닌 또 하나의 어둠이다.

소설가 김탁환
소설가 김탁환
펠리오가 가져갔던 ‘왕오천축국전’이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그동안 이 불세출의 여행가에 대한 이상할 정도의 무관심을 생각한다면 참으로 감격스러운 일이다. ‘왕오천축국전’은 늙음을 모르는 ‘젊음의 책’이다. 낮밤 없이 실크로드를 질주하는, 한반도와 중국과 인도를 거쳐 세계로 나아갔던 스무 살 혜초! 그 용감하고 힘찬 심장을 만나고 싶다면, ‘왕오천축국전’을 들고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달려갈 일이다. 그리고 혜초의 길로 나설 일이다.

▶ 세계문명전 ‘실크로드와 둔황’ 홈페이지 바로가기

소설가 김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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