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할머니 막춤’ 예술로 재탄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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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2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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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님께 바치는 댄스’
안무 ★★★★ 연출 ★★★★☆

할머니들은 열정적이었다. 공연 끝무렵 수십 개의 미러볼이 올라가고 마지막 춤판이 벌어지자 그 열기는 관객에게 옮아가 수많은 사람의 춤사위를 무대로 불러들였다. 안은미무용단 윤석기 씨 제공
할머니들은 열정적이었다. 공연 끝무렵 수십 개의 미러볼이 올라가고 마지막 춤판이 벌어지자 그 열기는 관객에게 옮아가 수많은 사람의 춤사위를 무대로 불러들였다. 안은미무용단 윤석기 씨 제공
무대 배경막은 언뜻 그저 하얀 스크린으로 보였다. 눈을 더 크게 뜨자 흰색 러닝셔츠, 흰색 속치마와 속바지, 흰색 ‘메리야스’를 켜켜이 덮어 놓은 모습이 보였다. 그냥 스쳐 가면 알아채지 못할 일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 안에 쌓이고 쌓인 사람의 인생이 아로새겨져 있다.

‘삶 속에 예술이 있다.’ 18∼20일 서울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무대에 오른 안은미컴퍼니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는 이 간단하지만 깨닫기 힘든 사실을 상기시킨 작품이었다. 무용단은 지난해 10월 3주 동안 전국을 돌며 춤추는 할머니들을 영상에 담았다. 이때 모은 할머니 220여 명의 춤사위는 이번 공연의 모티브가 됐다.

공연 첫머리부터 할머니들의 춤을 불쑥 내밀며 ‘예술로 느끼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잘 다듬어진 연출로 차곡차곡 단계를 밟아 나가며, 말미에는 누구나 엉덩이 들썩거릴 정도로 신나는 무대를 만들어냈다.

공연 첫머리, 무대 배경막에 영상이 비쳤다. 누구나 고향 가는 길에 볼 수 있을 법한 풍경이다. 교통표지판, 주유소, 잡초가 자란 시골길, 다시 교통표지판…. 로드무비를 연상시키는 화면 앞으로 안무가 안은미 씨가 등장해 뭔가를 찾기라도 하듯 흔들흔들 걸음을 걷다 곱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난장에 가까운 춤판이 벌어졌다.

가위 ‘막춤의 예술화’였다. 무용수들이 쏟아져 나와 무대를 가로지르며 뛰고 구르고 흔들어댔다. 양팔을 나란히 앞으로 세워 흔들흔들하거나 별안간 하늘로 손을 찔러댔다. 화려한 비보잉 기술과 곡예에 가까운 동작들이 ‘관광버스 춤’을 만나 강렬한 비트의 전자음과 어울렸다. 무용수들의 엄청난 에너지와 탁월한 신체능력, 잘 계산된 무대 사용이 어우러지면서 막춤도 춤이라는 사실을, 막춤도 예술이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할머니 특유의 ‘몸뻬 패션’ 역시 패셔너블한 무대의상으로 재탄생했다. 무용수들 모두 시골 5일장 좌판에서 갓 사온 듯한 강렬한 색감과 무늬의 의상을 쉴 새 없이 갈아입었다. 뽀글거리는 ‘할머니 파마’는 기본이다. 각종 형광색과 원색의 조합은 나름의 미감을 확보하며 ‘한국형 키치 패션’으로 거듭났다.

다음은 이 예술의 원천이 무엇인지 확인할 차례다. 무대 배경막으로 춤추는 할머니들 영상이 줄지어 등장했다. 과수원, 구멍가게, 미용실, 공중전화 부스, 버스터미널 대합실…. 제각기 다른 일상의 공간에서 할머니들은 수십 년간 기억해 오던 대로 박자를 탔다. 관객들은 왁자지껄 웃음을 터뜨리거나 박수를 치며 할머니들의 삶이 낳은 특유의 몸짓에 빠져들었다.

그제야 비로소 주인공들이 등장했다. 무용단이 작년 10월 만났던 경북 영주시 할머니 23명과 전북 익산의 신점순, 김길만 씨 부부가 무용수들의 손을 잡고 차례차례 무대로 나왔다. ‘사의 찬미’ ‘단발머리’ ‘여군 미스리’ 등 귀에 익숙한 가요 선율과 함께 날것 그대로의 막춤이 펼쳐졌다.

작품이 말하는 메시지는 신 씨, 김 씨 부부가 춤을 끝낸 뒤 더욱 분명해졌다. 무용수들이 차례로 등장해 부부에게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 함께 추는 춤이 이어졌다. 시종일관 열기를 뿜으며 달려오던 무대가 유일하게 숙연해진 순간이었다. 이름 없던 할머니들의 춤은 그렇게 무대로 호명돼 찬사를 받았다. 촌스럽지 않다, 늙거나 병들지도 않았다, 오히려 아름답고 힘이 넘치는 춤이라고.

공연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미러볼 수십 개가 내려와 나이트클럽을 연상케 하는 춤판이 벌어지면서 할머니들은 객석으로 손을 내밀었다. 무대 위로 올라오라는 그 부름에 관객 상당수가 거리낌 없이 무대에 올라 미친 듯이 몸을 흔들었다. 교복 차림의 학생, 푸른 눈을 한 외국인, ‘킬힐’ 신은 아가씨와 양복 입은 아저씨…. 춤추는 할머니 영상 말미 등장했던 ‘笑門萬福來·웃으면 복이 옵니다 舞門萬福來·춤추면 복이 옵니다’라는 문구는 그렇게 무대에서 실현됐다. 모든 사람의 춤사위와 삶이 예술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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