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새별 새꿈]<9>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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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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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들이 서로 놀지만… 그의 詩는 정교하다

《“동시다발”-눈 푸른 선생이 등 푸른 생선을 먹고 있을 때였다 고양이가 짧게 울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쥐가 죽어버리고 새가 하늘에서 배영을 하기 시작했다 비가 쏟아졌다 불투명한 것들이 단숨에 거덜 났다 아무것도 없는 여기로 네가 사선으로 걸어와 세계가 삼각형을 이루었다 사냥꾼이 소리를 질렀다 쥐도 새도 모르게 새가 죽었지만 그 누구도 표정을 짓지 않았다 180도 안에서 지분을 나누는 문제에 돌입하자 우리는 잠시 파렴치하고 어리둥절해졌다 (중략)》

‘언어유희 미학의 극단’을 보여준다고 평가받는 오은 시인은 “매일 쓰는 우리말이라는 것, 실은 얼마나 감칠맛 나는 것인지 시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종승 기자 urisesang@donga.com
‘언어유희 미학의 극단’을 보여준다고 평가받는 오은 시인은 “매일 쓰는 우리말이라는 것, 실은 얼마나 감칠맛 나는 것인지 시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종승 기자 urisesang@donga.com
은 시인(29)의 등장은 당혹스러웠다. ‘어떤 날엔 눈만 감아도 석 자 코가 썩썩 잘려 나갔다 무심코 돌다리를 두드렸다가 핑계 없는 무덤에 매장되기도 했다 아니 땐 굴뚝이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매연을 뿜었다…’(‘어떤 날들이 있는 시절 3-속담으로 구성된 어떤 말놀이’)

에너지 넘치는 수다로 가득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은 곧 5쇄를 찍는다. 신인 작가의 첫 시집이 대개 1년이 지나도 증쇄하기 어려운 현실을 생각하면, 출간한 지 2년이 채 안된 이 시집의 판매 부수는 기록적이다.

○ “등단이 뭔가요?”

2002년 대학 합격 소식을 들은 다음 날, 전화가 걸려왔다. “오은 씨, 등단하셨습니다.” 술이 덜 깬 청년이 물었다. “어… 등단이 뭔가요?” 동생이 끼적여놓은 걸 보고 형이 가져다가 문예지 신인상 공모에 투고한 게 덜컥 당선이 된 것이다. 시라고는 교과서에 나온 작품을 읽어본 게 전부였다던 스무 살 청년은 그렇게 시인이 됐다.

“재수할 때 서점에서 문예지 코너를 지나다가 부딪쳐서 문예지가 앞에 툭 떨어졌어요. 생각 없이 들춰보는데 정재학 형 시가 나오더라고요(정재학 씨는 모더니즘 시의 새로운 기수로 평가받는 젊은 시인이다). 이런 게 시라면 나도 재미있게 쓸 수 있겠다, 생각하고 끼적였는데… 형이 등단시켜 준 거죠.”

첫 시집은 늦게 묶였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젊은 시인을 북돋우는 분위기가 아니었던 데다 서울대생이 시를 계속 쓰겠냐는 ‘의심의 눈길’도 있던 터였다(오 씨는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1년에 잘해야 한두 편 시 청탁을 받던 때에 그는 학생운동을 했다. 바뀌는 것 하나 없는 현실에 지쳐버렸고, 캐나다로 떠났다.

보고 싶은 영화를 종일 보면서 블로그에 감상문을 올리던 어느 날 댓글 하나를 발견했다. “저는 시 쓰는 김언이라고 합니다. 영화평론 하시나 봐요.” 2000년대 시단을 뜨겁게 달궜던 미래파 시인 중 한 명인 김언 씨였다. 오 씨는 “저도 시인이에요. 등단인가 뭔가 했다던데요”라는 답글을 달았다. ‘시와 사상’의 편집장이었던 김언 씨가 ‘다섯 편이나’ 청탁을 했다. 눈 밝은 선배 시인이 영민한 후배의 글솜씨를 알아챈 2004년 가을의 인연으로 시를 쓰게 되면서, 오은 씨는 “시가 재미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 말을 갖고 노는 시인


“새로운 시적 규율을 만들어가는 시인”(시인 이재훈), “언어가 구성하는 사회적 조건과 가치를 의심하고 질문하게 한다”(평론가 허윤진)…. 젊은 시인의 발랄한 말놀이는 유희에 그치지 않는다. 그의 시는 언어라는 것을 낯설게 보이도록 한다. ‘느닷없이 접촉사고/느닷없이 삼각관계/느닷없이 시기질투/느닷없이 풍전등화’(‘미니시리즈’) 같은 시구로 대중문화의 클리셰를 쑤셔대고, ‘늙은 돼지들은 구석에 누워 심하게 낄낄거립니다/약고 퍅하고 야한 농담을 즐기죠/젊은 돼지들의 토실토실 오른 살을 부러워했고’(‘호텔 타셀의 돼지들’) 같은 구절로 세대 간 단절된 모습을 돼지에 빗대 비꼰다.

그는 손이 쓰는 게 아니라 기계가 치는 것 같은, 매끈한 말놀이로 독자의 정신을 얼얼하게 한다. 그런데 되는 대로 중얼거리는 게 아니다. 정교한 작업을 거친 것이다. “차곡차곡 쓰는 스타일입니다. 어휘에 관한 자료를 모아요. 휴대전화 메모장이 꽉 차도록 메모를 해놓고요.”

2009년 교통사고를 겪은 뒤 정신이 온전히 들기까지 3개월, 1년의 재활치료를 겪고도 “그러잖아도 긍정적인데 더욱 긍정적이 됐다”며 깔깔 웃는다. 그 명랑함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최근의 발표작 ‘사우나’.

‘…맞아 죽을 것도 아닌데 왜 흘끔흘끔 눈치를 보는가 첫날밤도 아니면서 왜 수줍어 어쩔 줄을 모르는가 발가벗은 사람들이 제각기 육질을 뽐내며 달구어진 나무 위에 앉아 있다…’

KAIST 문화기술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을 단행본 ‘너는 시방 위험한 로봇이다’로 펴낼 만큼 다방면의 재주꾼이다. 올해 상반기엔 미술산문집을 낼 계획이고, 하반기 두 번째 시집 출간을 준비하고 있다. 그에게 시인이란 무엇이냐고 물었다.

“어떤 것을 (다른 사람과) 똑같이 보지만 그것을 완전히 다르게 말할 수 있는 사람.” 매일 쓰는 언어의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 사람, 그는 시인이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동시다발▼

눈 푸른 선생이
등 푸른 생선을 먹고 있을 때였다
고양이가 짧게 울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쥐가 죽어버리고
새가 하늘에서 배영을 하기 시작했다
비가 쏟아졌다
불투명한 것들이 단숨에 거덜 났다
아무것도 없는 여기로
네가 사선으로 걸어와
세계가 삼각형을 이루었다
사냥꾼이 소리를 질렀다
쥐도 새도 모르게 새가 죽었지만
그 누구도 표정을 짓지 않았다
180도 안에서
지분을 나누는 문제에 돌입하자
우리는 잠시
파렴치하고 어리둥절해졌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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