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이름 모를 여인들의 애환 서린… 옛날 천에 책보다 큰 가르침 숨겨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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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2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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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퀼트 명인 구로하 시즈코 씨가 11월 28일 서울 인사동에서 일본의 옛 천을 들고 강의하고 있다.
일본 퀼트 명인 구로하 시즈코 씨가 11월 28일 서울 인사동에서 일본의 옛 천을 들고 강의하고 있다.
1975년 평범한 일본인 주부는 남편 일자리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다. 자투리 천을 이어 만든 150년 전 침대 커버를 접한 뒤 앞으로 바느질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당시 38세였던 구로하 시즈코 씨(72)를 현재 일본 퀼트 명인으로 만든 순간이다. 그 전에는 바느질이라고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다.

“미국에서 처음 본, 오래전 침대 커버가 전해준 감동, 떨리는 마음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바느질법도 제대로 몰랐지만, 내가 바느질한 것들을 어느 나라 사람이든 남녀노소 누가 보든 그때의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게 하고 싶다는 간절함뿐이었죠.”

일본 퀼트의 대모로 불리는 구로하 씨가 11월 말 가족여행 삼아 한국을 찾은 길에 바느질에 매료된 한국 여인 20여 명과 28일 서울 인사동에서 만났다. 그는 이 자리에서 자신의 삶과 일본 전통 패브릭, 침선에 대한 생각 등을 열정적으로 풀어놓았다.

○ 푸른빛 천에 반하다

구로하 씨는 일본에 돌아오자마자 가게에 가서 천을 사왔다. 바늘과 천의 종류에 대해 전혀 몰랐던 그는 뻣뻣한 천을 바느질하느라 애를 먹어가면서 하나둘씩 배워나갔다. 새 천이 바느질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뒤 친척집을 돌아다니며 안 입는 옛날 옷을 모으기 시작했다.
일본 전통 천을 사용해 만든 구로하 씨의 바느질도구함.
일본 전통 천을 사용해 만든 구로하 씨의 바느질도구함.

“몇십 년간 입고 세탁하기를 반복한 터라 천이 부드러워져서 바느질하기가 한결 좋더라고요. 반질반질한 새 천이 옛 옷감 같은 감동을 전하지 못했고요. 남들이 안 쓰는 천을 모아서 바느질을 하다보니, 과연 일본인이 추구하는 색깔, 일본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색깔은 뭘까 고민하게 됐습니다.”

그는 ‘쪽염(아이조메·あいぞめ)’에 끌렸다. 에도시대에 일바지(몸뻬)는 쪽빛으로 염색한 것이 많았다. 때가 잘 타지 않고 때가 묻어도 눈에 띄지 않아 자주 안 빨아도 되는, 서민이 가장 많이 입는 옷 색깔이었다.

“일본인들에게 아이조메는 가난, 일과 나란히 놓이는 것이지요. 일본 구석구석마다 서민들이 애용하며 다양한 문양과 염색을 시도하면서 디자인 면에서 발전을 이뤘습니다.”

구로하 씨는 일본의 전통 패브릭을 여러 종류 들고 와 보여줬다. 나무 문양을 새긴 200∼300년 전 기모노 천부터 푸른 체크무늬를 직조한 천까지 다채로웠다. 그는 국내 정세가 좋지 않은 시절에는 무늬도 부드러운 것보다는 직선 위주의 딱딱한 것, 성 같은 커다란 그림을 새긴 천이 많이 팔렸다고 전했다.
쪽염을 한 일본 전통 패브릭과 이를 이용해 구로하 씨가 만든 생활소품들.
쪽염을 한 일본 전통 패브릭과 이를 이용해 구로하 씨가 만든 생활소품들.

○ 천에 깃든 이야기를 사랑하다

구로하 씨는 일본에 퀼트가 널리 알려지지 않은 때에 일본의 쪽염 천을 퀼트에 도입해 그만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자연이나 공상에서 얻은 이미지를 바탕으로 만든 작품을 통해 일본 옷감의 매력을 세계에 소개하는 역할도 해오고 있다. 1980년부터 지금까지 출간한 저서만 28권에 이른다.

“일본에서 패치워크, 퀼트 인구가 크게 늘어난 것은 서양 문명이 미친 영향이 크지요. 서양의 유행에 뒤지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새로운 천을 재빨리 쓰고 유럽의 옛날 천을 구하기도 하지만 자기 것을 얼마나 이해하고 잘 활용하는가에 가장 중요한 차별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로하 씨는 천을 많이 생산했던 지역의 고물상을 돌며 옛날 천을 수집한다. 직조하느라 구슬땀을 흘렸을 여인들을 생각하면서 그는 쉽게 그 천에 가위를 댈 수 없다고 말한다. 책으로 배우기보다는 옛것에서 가르침을 얻는다는 설명이다. 한국에는 감침질, 상침질 등 다양한 바느질 기법이 있지만 일본에서는 가장 단순한 홈질로 바느질을 한다.

“귀한 옛 천을 잘라 만든 패치워크(작은 조각천이나 큰 조각천을 이어 붙여 한 장의 천을 만드는 수예) 작품을 전시회에 낸다고 해서 그것이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좋은 옛 것은 가까이 두고 보면서 이 감성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하는 것이 낫죠. 천의 재질, 문양의 크기, 이 무늬를 넣은 이유, 염색의 강도, 공간 배치…. 옛날 장인들은 학식은 없어도 뛰어난 균형감으로 공간미를 잘 표현했어요.”

이날 모임을 주선한 지수현 원광디지털대 한국복식과학과 교수는 “침선에는 지금 이곳에 사는 여성들이 생활 속에서 어떤 방법으로 표현하고 즐기는지가 오롯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글·사진=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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