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잊지 못할 강렬한 기억 한편의 詩에 이렇게 녹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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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8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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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세계’ 가을호 특집

김종해 시인 “심야에 목격한 교통사고, 가장 잃은 가족 생각하면 죽음의 덫 떠올라”
김종해 시인 “심야에 목격한 교통사고, 가장 잃은 가족 생각하면 죽음의 덫 떠올라”
어린 시절 설탕통을 끄집어내어 ‘달고나’를 해 먹으려던 허수경 시인. 국자를 불에서 내리려던 순간 연탄불에서 유리조각이 튀어 올라 두 눈 사이에 박혔다. 아픔보다는 실명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자지러지게 울었다. 성인이 된 지금도, 실명의 공포가 똬리를 틀고 있다고 고백한다. ‘숲이 커다란 눈동자 되어 그 눈동자 커다란 검은 호수가 되어’라는 인상적인 시구의 시 ‘눈동자’가 이 공포에서 비롯됐다.

김광규 시인 “1954년 한국의 월드컵 참패 보며 승부에 대해 관조하게 돼”
김광규 시인 “1954년 한국의 월드컵 참패 보며 승부에 대해 관조하게 돼”
계간 ‘시인세계’ 가을호는 한 편의 시를 탄생시킨 시인들의 특별한 경험을 엮은 기획 ‘내 인생 최고의 시적인 장면’을 선보였다. 시인 18명의 시에 담긴 인생의 결정적 순간을 기록한 것이다.

올해 고희를 맞은 김종해 시인은 30대 초반에 목격한 교통사고를 잊지 못한다. 퇴근길에 탄 상계동행 막차버스가 한 사내를 친 것이었다. 시인은 돌아오지 않을 가장을 기다릴 그의 아내와 아이들에 대한 생각에 그날 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시 ‘이야기’에 놓인 서사다. ‘우리의 마지막 상계동행 만원 버스는/죽은 그 사나이 때문에/자꾸 뒤로뒤로 굴러가고/…/그 죽음의 덫을/여러분, 보신 적이 있나요’

강은교 시인 “입에 털어 넣었던 약. 그 젊은 날에 남아 있는 나의 한생애”
강은교 시인 “입에 털어 넣었던 약. 그 젊은 날에 남아 있는 나의 한생애”
중학생이었던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때 대한민국이 헝가리와의 경기에서 0-9로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나라에서 월드컵대회가 열린 2002년 김광규 시인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볼을 골대에 차 넣는 것만이 승리라고 믿을 수 없는 나이에 이르렀음”을 깨닫는다. ‘월드컵 축구 중계에도 아랑곳없이/들판에서 온종일 땀 흘리는 보람으로/짙푸르게 우리의 여름이 익어갑니다/승리는 이렇게 조용히 옵니다’라는 시 ‘오뉴월’은 이 상념에서 나왔다.

문정희 시인 “수의에서 나온 어머니 글씨 보자, 수천 마리 나비가 나는 것 같은 환상이”
문정희 시인 “수의에서 나온 어머니 글씨 보자, 수천 마리 나비가 나는 것 같은 환상이”
‘햇빛이 바리움처럼 쏟아지는 한낮’이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시 ‘위험한 생애의 허공’에는 강은교 시인의 젊은 날이 들어 있다. ‘바리움’은 그가 죽으려고 작정하고 입에 털어 넣었던 약 이름이다. “나도 잊어버렸던 어떤 날들, 그러니까 나의 한 생애가 거기 있었던 것”이라고 시인은 고백한다.

서울 북한산에서 내려오다 너럭바위에 앉은 장석남 시인은 팥배나무 꽃잎들이 바위 위에 내려앉는 장면을 본다. 인간이 열 수 없는 바위의 속을 꽃잎이 훤하게 뚫어서 보여주고 있다고 시인은 느낀다. 이 ‘고요하고 하찮은’ 장면을 시 ‘길’은 이렇게 승화한다. ‘팥배나무와/바위/사이/꽃잎들이 내려온/길들을/다/걸어보고 싶습니다’

장석남 시인 “등산길 바위에 내려앉은 꽃잎들에서 영감”
장석남 시인 “등산길 바위에 내려앉은 꽃잎들에서 영감”
돌아가신 어머니를 수의로 싸드리던 중 어머니가 쓴 ‘베개’라는 글자가 수의에서 나오자 그 글자가 수천 마리 흰 나비로 날아오르는 것 같은 환상에 빠졌다는 문정희 시인(시 ‘베개’),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오토바이를 모는 배달 소년에게서 “세상이 무서워 스스로 무서운 아이가 될 수밖에 없음”을 포착한 이원 시인(시 ‘영웅’)…. 시인들의 ‘인생 최고의 시적인 장면’은 이렇듯 한 편의 시에 오롯이 응축된 한순간의 강렬한 기억이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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