왁자지껄 정선 장터에 詩가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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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8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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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협회 ‘길 위의 시인들’ 행사

7일 오후 강원 정선군 장터에서 열린 ‘길 위의 시인들’ 행사에서 시인 문인수 씨가 무대에 올라 자신의 시 ‘오지 않는 절망’을 낭송하고 있다.
7일 오후 강원 정선군 장터에서 열린 ‘길 위의 시인들’ 행사에서 시인 문인수 씨가 무대에 올라 자신의 시 ‘오지 않는 절망’을 낭송하고 있다.
정선 장터에 시인들이 나타났다.

7일 오후 5시 강원 정선군 장터. 병풍처럼 산이 둘러싼 이곳에 김남조 이근배 이건청 이영춘 문인수 씨 등 시인 40여 명이 도착했다. ‘아라리 나물집’과 ‘아라리 황기찐빵’, 더덕과 찐 옥수수를 파는 노점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시장 골목 한편에 설치된 무대가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남조-이근배 씨 등 40여명 주민-관광객과 어우러져 낭송

낡은 자전거를 끌고 온 할아버지, 손에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든 아이들, 노인정 친구들과 함께 온 할머니…. 통나무 벤치와 무대를 둘러싼 평상을 정선 주민과 관광객 150여 명이 꽉 채웠다. 한국시인협회가 이날 처음 주최한 찾아가는 시운동 ‘길 위의 시인들’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모인 시인들은 주민과 관광객 사이사이를 채워 앉았다.

살풀이춤 공연과 장구 공연이 한바탕 끝난 뒤, 팔순을 넘긴 김남조 시인이 문정희 시인의 손을 붙잡고 무대 위로 올라와 짧은 축사를 했다. “시인은 여러분이 흘리는 눈물, 감춰둔 미소, 그것들을 잘 거둬서 다듬어서 다시 공손히 두 손으로 드리고자 하는 열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번에 정선에서 (집으로) 돌아가면 많은 시를 쓰려고 합니다.”

한 수 읊고나면 막걸리잔 돌고… “방방곡곡 찾아 詩心일깨울 것”

이어 이근배 시인이 무대에 올랐다. “아리랑을 낳은 고장인 정선은 시의 고향이나 다름없다”고 인사말을 한 이 씨는 자신의 시 ‘정선 아라리’를 낭송했다.

사람들은 낭송할 시가 적혀 있는 책자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때로는 무대를 쳐다보고 때로는 책자를 들여다보며 진지하게 시를 감상했다. 한 편 한 편 낭송이 끝날 때마다 박수가 터졌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옥수수 생막걸리와 감자부침, 수수부꾸미가 관객들 사이를 돌았다. 시인들도 직접 나서서 사람들에게 막걸리를 따라주었다. “슬픔은 어디서나 자라고 있다/곱슬곱슬한 고사리의 머리털 같은 슬픔/백이숙제도 먹지 않았다는 서글픈 나물의 이름 같은/해묵은 핏발이 풀리지 않고 새록새록 피어난다/완장을 찬 역무원이 씩씩하게 깃발을 올리자/질긴 슬픔 몇 덩이가 꾸물거리며 출발한다…”(박세현, ‘별어곡’)

이건청 한국시인협회장(왼쪽 서 있는 사람)이 주민들에게 막걸리를 따르고 있다.사진 제공 한국시인협회
이건청 한국시인협회장(왼쪽 서 있는 사람)이 주민들에게 막걸리를 따르고 있다.사진 제공 한국시인협회
관객이 시를 읽는 순서도 마련됐다. ‘별어곡(別於曲)’을 읽은 홍정임 씨(49)는 차로 1시간 떨어진 영월에서 행사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홍 씨는 “박세현 시인의 시가 이 고장 정서를 깊이 알아주는 듯해서 평소 좋아했다. 소외당하고 어려워하는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시인들이 시로 잘 챙겨주는 것 같다. 영월에서도 이런 행사가 열렸으면 좋겠다”고 했다.

tvN ‘롤러코스터’의 ‘여자’ 목소리로 유명한 성우 서혜정 씨도 시낭송 음반을 냈던 인연으로 이날 행사를 찾아 이근배 시인의 ‘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수국에 와서’를 낭송했다. 시집 ‘동강의 높은 새’를 내는 등 평소 정선에 관한 시를 자주 발표해온 문인수 시인은 ‘오지 않는 절망’을 낭송했다. 무대에서 내려온 문 씨는 “정선에 오면 늘 ‘돌아왔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시 낭송은 약 2시간이 지난 뒤 어스름이 내릴 무렵 마무리됐다. 행사장 건너편에서 메밀차와 찐옥수수를 팔던 최혜원 씨(42)는 “장사에도 신경을 쓰느라 낭송되는 시를 꼼꼼히 듣지는 못했지만 우리네 정서랑 딱 맞는 시들을 읽으신 것 같다.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길 위의 시인들’ 행사는 앞으로도 장소와 소재를 달리해 계속 개최될 예정이다. 이건청 한국시인협회장은 “시인들이 직접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 시를 낭독하고 시민들과 어우러지며 현대에 결핍된 감성과 직관, 상상력을 불러일으키자는 취지다. 오늘 행사에 참여한 시인들은 앞으로 정선에 관한 시를 써서 책자로 묶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26일 열리는 다음 행사에서는 시인 30여 명이 경기 양평군에서 소외계층에게 집을 지어주는 ‘해비타트 운동’에 참여한 뒤 집이 갖는 의미를 되새기는 시를 짓고 낭송한다.

정선=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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